어그로가 날뛰는 김에 적기 시작했던 독백로그 | 과거 | 잡담방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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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리베리우스가 아직 리베리우스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전의 이야기이다.
미래에 리베리우스라 불릴 소년, 에르킨 다무 파호드는 십수 년 만에 파호드 부족으로 돌아왔다. 젖먹이었던 시절 그의 양친이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제국군의 침략에서 도망친 이래 처음이었다. 당연히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고, 그 어린 아이가 산간 마을에 오고 싶어하리라 예상했던 사람도 없었다. 실제로 마을 어른 중 한 명은 에르킨한테 왜 마을로 돌아왔느냐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묻기도 했다. 좋은 나라에 입양갔으면 그곳에서 등 따숩게 살 수 있지 않느냐면서.
에르킨도 그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에르킨은 그 정갈하고 엄숙한 도시에서 살 수 없었다. 매일같이 숨이 막혔다. 본인조차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감각이었으나, 사실이 그랬다. 에르킨은 차라리 영원히 정착하지 아니한 채로 돌산을 떠도는 파호드 부족이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여기라면 제대로 숨을 쉬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평온한 나날은 길게 가지 않았다. 갈레말 제국군 중대가 기어코 능선을 넘어와 오지에 거주하던 토착 민족한테까지 총부리를 겨누었다. 날이 밝을 때까지 항복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 그러나 계속해서 항전한다면 씨도 남기지 않고 몰살시키겠다. 중대장의 전령이 그렇게 말했었다.
"어르신, 난 당최 이해를 못 하겠소. 저쪽에서 목숨은 살려주겠다 하지 않았소?" 언젠가 에르킨한테 치즈덩이를 나눠주었던 어른이 말했다. "저들의 무기가 나무를 불태우던 걸 생각해보시오. 우리의 창대로는 상대조차 안 될 게요. 내가 똑똑히 보아 알고 있소!"
마을에서 가장 넓은 천막집 내부는 수많은 말소리로 소란스러웠다. 침착하게 주장을 펼치는 토론가는 차라리 양반이다. 지레 겁먹어 때 이른 절망에 빠진 사람도 여럿이며 어른들의 분위기에 그대로 노출된 아이들은 말을 잃거나 말이 너무 많거나 둘 중 하나를 택했다. 에르킨이 사랑했던 산바람은 유독 그날 밤에만 잠잠했다. 바람 없이도 자애로운 달이 없는 밤공기는 충분히 서늘했다.
마을에서 가장 지혜로운 이, 부족장이 목소리를 내었다.
"아지즈야, 너도 알지 않더냐, 가만히 고개를 숙여서야 어찌 우리가 긍지 높은 파호드족이라 할 수 있겠느냐. 저들이 우리한테 치욕을 주더라도..."
"그 놈의 긍지가 우리 목숨까지 살려준단 말이오? 카키모라족이 어떻게 됐는지를 생각해 보시오. 거대한 철덩이가 불을 뿜자 그 이름난 전사도 맥을 못 추리고 쓰러지지 않았소이까! 난 그런 전쟁터로 우리 아들딸은 못 보내오."
"입 조심하시오! 듣자듣자하니 안 되겠군, 차라리 여섯 살 난 자네 딸이 더 용맹하겠소! 시작하지도 않은 싸움을 벌써부터 두려워해서야 어쩌자는 게요!"
"그렇지만 아지즈의 말이 틀리지는 않잖소. 그들을 이길 계책이라도 있는 게요?"
"수로만 봐도 우리가 질 게 뻔히 보이는 것을..."
"다른 부족들이랑은 뭐 이길 걸 알고 싸웠나..."
말. 말. 말이 많다. 에르킨은 머릿속에 점점 짜증이 쌓이는 걸 느낀다. 경청의 방법도 모르는 것들이 자신의 발언만 옳다며 득달같이 달려들고 있다. 이 상황을 어떻게든 바꿔야 한다고 에르킨은 생각했으나 아무것도 못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 상태가...
"아저씨! 그거 아니에요! 잘못 알고 계세요!"
"도마국을 떠올려봐요! 누나는 거기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봤잖아요!"
"제국에는 절대 가면 안 된다니까요!"
... 아무리 소리를 질러봐도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열다섯밖에 되지 못 한 소년은 성인 남성은 물론이고 웬만한 성인 여성보다도 키가 작았다. 게다가 마을에 들어온지 얼마 안 되는 신세이기까지 한데, 아무리 까치발을 들고 팔을 올린다 해도 그의 말을 귀담아 듣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너무 답답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학교에서는 적어도 다들 상대방의 말을 듣는 척이라도 했었는데!
"다 조용히─!"
부족장이 지팡이를 세게 내리찍었다. 지나치게 흥분하여 시장바닥처럼 떠들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차츰 잦아든다. 에르킨은 부족장한테 사회자의 역할을 기대하며 그를 바라보았고, 이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채 부족장은 마른 기침을 몇 번 했다.
"한 사람씩 좀 말 해라, 이것들아. 여전히 쓸데없이 팔팔하니 이 늙은이가 기쁘기야 하다만 도가 지나치지 않느냐. 너무 시끄러워서 뿔이 다 아프다. 한 명 씩, 돌아가면서, 잘 알아먹었느냐?"
부족장은 지팡이로 옆 사람을 가리켰다.
"네가 먼저 말해보거라."
염원하던 발언 기회가 에르킨한테 찾아왔다. 그가 제일 배운 사람이어서도 아니고, 그가 존경받는 위치여서도 아닌, 그저 우연히 부족장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얻은 기회다. 하지만 이것만 해도 에르킨한테는 큰 기회다. 그는 말할 시간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부족 사람들을 설득시킬 자신이 있었다.
에르킨은 떨리는 손을 가슴 앞에 그러모았다.
"여러분, 제 말을 잘 들어주세요. 제국이랑 싸워도 괜찮아요. 군인들한테서 도망쳐도 괜찮아요. 하지만 절대로 저들한테 항복해서는 안 돼요. 그것만은 반드시 피해야 해요."
심장이 바쁘게 뛰어 가쁜 숨을 정돈했다. 그 틈새로 부족 어른 하나가 말을 끼어들었다.
"도망치는 거나 항복하는 거나 뭐가 다른지 나는 모르겠구나."
"아직 말하고 있잖느냐."
부족장이 지팡이를 바닥에 찍으며 질책했다. 에르킨은 그 부족민과 눈을 마주했다.
"... 오사드 대륙 안에서는 동방 연합이, 그리고 대륙 바깥에서는 알라미고가 갈레말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어요. 알라미고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 아세요? 노예가 된 것마냥 착취당하는 데다가 인간만도 못 한 취급을 받으며 모욕적으로 살아가고 있다고요. 도마국 사람들은 여기 사람들도 아는 분들이 많을걸요? 다들 보셨었죠? 그게 사람 사는 꼴이 맞아요? 다들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을 거 아녜요!"
적절한 어투, 적절한 손짓, 적절한 표정을 곁들여가며 에르킨은 열변을 토했다. 어렵게 만난 고향 사람들이 제국의 손에 넘어가는 것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막고 싶었다. 어쩌면 자신이 샬레이안에 가서 지식을 배워온 것도 이 사태를 막길 바라는 하이델린의 뜻이 아니었을까? 에르킨은 오만하게도 그렇게까지 생각했다...
에르킨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부족민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게 뭐가 나쁘다는 거냐?"
"...... 네?"
"도마는 갈레말과의 전쟁에서 졌잖아. 알라미고라는 나라도 똑같을 거 아니냐? 약한 자는 강한 자를 따라야 하는 법, 거기에 따르는 것 뿐.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
에르킨은 할말을 잃었다. 자기 부족이 침략당하기 일보 직전인데 저런 말이 나올 수가 있나?
"도, 도의적으로 그래선 안 되는 거잖아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사익을 위해서 함부로 대하는 건......"
"얘야. 네가 바깥물 먹어서 모르는 모양인데... 우리 아우라 젤라는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단다. 싸우고, 다치고, 피흘리고, 지키고, 버려지고, 그러면서 이 바위산에서 살아남은 거다. 파호드가 다른 부족은 안 잡아먹었을 것 같더냐? 내 증조할머니는 지금은 없는 부족 출신이셨어!"
...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껏 저런 논리는 접해본 적이 없었다. 에르킨의 이성은 저 말이 잘못되었다고 경종을 울렸으나 구체적으로 어디가 잘못됐는지 집어낼 능력이 그한테는 없었다. 푸른 눈이 바르르 떨리는 사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입술은 곳곳에 있었다.
"우리의 삶 그 자체를 부정해선 아니되긴 하오."
"하지만 그렇다고 앞으로 치욕스럽게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다들 그러길 바라요?"
"그러니까 도망가자고 저 아이도 말하는 게 아니겠소. 나는 에르킨의 말에 찬성이오."
"아니지. 사람답게 살지 못 할 바에야 끝까지 긍지는 지키자는 말이잖아. 이대로 그냥 도망이나 치자고? 다들 자존심도 없어?"
"저, 저기요."
어른들은 이미 에르킨한테 관심이 없었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다. 좀 더 멋지게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있을줄 알았는데. 에르킨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고 부족장의 지팡이 소리는 여전히 거대하게 뿔을 울렸다.
"말 한 마디 할 때마다 하나하나 말대꾸하지 좀 말아라! 애송이들이 혓바닥에 기름칠은 아주 잘 했구나! 자, 다음!"
"저 아직 다 안 했..."
"솔리하가 말해보거라."
에르킨의 기회는 허망하게 넘어갔다. 다음 타자가 자신만의 말을 파호드의 언어로 말하고, 다른 부족민들이 거기에 끼어드려 하고. 말로써 이어지는 난전이 계속되었다. 거기에 에르킨의 자리는 없었다. 그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에르킨은 이것이 자신이 화가 났음을 알리는 신호라는 걸 안다. 눈 앞이 새하야면서 동시에 벌겋기도 하다. 이대로 간다면 애먼 사람한테 화풀이를 해버릴 것만 같아, 에르킨은 누구한테도 꼬리 끝 하나 닿지 않고 천막을 뛰쳐나왔다. 어디든 좋으니 저 인파로부터 멀리 떨어져야 했다.
첨벙.
강물을 한가득 퍼올려 세수를 한다. 손끝이 아릴 정도로 세수를 해도 열이 식지를 않아 아예 머리를 강물에 담갔다. 숨방울이 보글보글 피어오른다. 수십 초가 지나고 머리를 들어올리자 푹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줄기가 쏟아진다. 노기를 채 다 버리지 못 한 두 눈은 굳게 감겨 있다.
"진정해...... 참자. 내가 참는 거야."
상황이 마음에 안 들게 흘러가거든 폭력부터 쓰고싶어지는 건 에르킨의 고질적인 나쁜 버릇이다. 이걸 고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던가? 어머니와 아버지의 수고를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에르킨은 지금 무조건 참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 각고를 다 한다.
에르킨은 본인들이 처한 상황을 잘 모르는 듯한 마을 사람들한테 화가 났다. 당장 내일이면 침략당해 존엄이고 뭐고 다 없어질 사람들이 약육강식의 논리나 들이밀고 있다. "인간이 되어서는 그딴 말이나," 아니, 아니다. 분노의 방향을 잘못 정해서는 안 된다. 에르킨이 화를 내야 할 대상은 무력정복을 꾀하는 제국이어야 하지 죄없는 부족민이어선 안 된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자. 냉정한 머리로 이성적인 생각을......
"...... 아니 근데 저 새끼들이 먼저 멍청하게!!"
쾅! 나무 줄기에 주먹질을 하자 구멍이 커다랗게 패인다. 기둥 한중간을 반절이나 잃어버린 나무가 기어코 기우뚱 넘어진다. 강물 위로 넘어진 나무가 물보라를 일으키는 동안에도 에르킨은 여전히 이마에 열이 잔뜩 올랐다.
에르킨도 알고 있다, 이 곳 사람들은 교육다운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더불어 사는 사회란 어떤 것인지, 도덕을 논하기 이전에 공용어 문자를 읽을 줄 아는 사람도 절반을 넘지 못 할 것이다. 배우지 못 한 사람들을 어찌 욕할 수 있으리, 그러니 지금 느끼는 분노는... 설득시킬 능력이 없는 자신을 향한 것이 절반이요 옳지 못 하게 흘러가는 세상을 향한 게 나머지 절반일 터다.
"............ 짜증나."
이 울분은 세수 한두 번 하는 것만으로는 쉬이 풀리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에르킨은 무엇을 해야 할까? 시한폭탄같은 성질머리를 이끌고 마을로 돌아가야 할까? 에르킨은 그러지 않기로 결심했다.
자갈밭에 던져놨던 호신용 외날검을 꼬나쥐고 비틀비틀 걸어간다. 방향은 산 너머, 제국군 중대가 진지를 쳐놓은 공터다. 피가 지나치게 쏠린 두뇌가 지극히 단순한 논리를 내놓았다. 부족민들 말대로 약한 자가 강한 자의 말을 들어야 하는 법이라면 자신이 대장 모가지를 쳐버렸을 때 모두가 자신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 새끼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암살 대상으로 삼은 건 푸른 눈의 금발 남자아이. 자신보다도 나이가 적어보였지만 황태자라고 불렸으니 그 자가 저 중대 안에서 가장 높은 위치일 것이다. 선전포고를 하는 군인들을 보려고 몰려든 여러 부족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에르킨은 우연히 그 소년을 발견했었고, 그 또한 오랫동안 눈맞춤을 유지했었다. 누군가한테는 일생이 걸린 중대한 사태를 벌여놓고 이 모든 게 지루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소년.
"죽여버리겠어."
그 얼굴을 떠올리자 다시금 짜증이 치솟는다. 지금 당장에라도 그 잘난 상판대기를 물어뜯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을 것 같다.
별만이 빛을 더하는 가장 어두운 밤. 에르킨은 생애 첫 인간 사냥을 나섰다. 실패로 끝날 것이 예정된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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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킨은 억울하다. 이렇게 허접한 애송이한테 패배할 에르킨이 아니었다.
갈레말 제국의 황자, 제노스 예 갈부스한테 그가 패배한 건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제국군은 다수였으나 에르킨은 혼자였다. 아무리 제노스를 실력으로 압도한다 한들 사방에서 날아오는 총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거의 성공할 뻔했던 암살 시도는 실패했고, 에르킨은 사지가 묶인 채로 포획되었다. 그 상태로 몇 개의 낮이 지나갔다.
"......"
파호드 부족은 어떻게 되었을까. 생존자가 남아 있을까. 차라리 마을에 남아 그들과 함께 끝까지 싸웠어야 했다는 후회는 굶주림과 더불어 깊어져 갔다. 답답함에 머리를 찧으면 뿔의 쓰라린 고통과 이마에서 흐르는 선혈이 남는다. 에르킨은 그것들과 며칠을 동거했다.
아픔과 함께 달리던 수송 차량이 부드럽게 멈춰선다. 얼마 안 가 컨테이너 문을 열며 나타난 제국군 병사가 에르킨의 몸뚱이를 들쳐멘다. 도축당한 고깃덩이마냥 호송되는 에르킨의 꼴은 여느 식민지인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에르킨은 본인이 감옥이나 지하실 따위에 갇힐 거라 예상했건만, 병사가 그를 던져놓은 곳은 누가 봐도 화려하고 고급스럽게 꾸며진 방이었다. 마을의 천막 서너 개를 합친 것보다 훨씬 넓은 데다가 햇빛이 잘 들어오기까지 하니 적어도 자신같은 평민이 머물 법한 공간은 아니지 않나. 경계심에 눈동자를 굴리고 있으려니 갑옷 철판끼리 맞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제노스가 방 안으로 들어온다.
"얌전하군."
거리를 둔 채 멈춰선 제노스가 말했다.
"나를 죽이려고 달려들던 짐승이라고는 생각하지 못 할 정도로."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열세 살 애송이가 지껄이는 도발이 우습다. 에르킨은 잘 돌아가지 않는 혀를 놀린다.
"마비독을 그렇게나 처발라놓고 쌩쌩하길 바랐냐. 네 대가리를 잘 못 쓰겠어?"
발음은 어눌하고 속도도 느리다. 근육을 못 움직이게 만드는 독을 성으로 오는 며칠 간 계속 맞은 탓이다. 덕분에 자신의 부족을 침략한 적국의 핵심 인물이 눈 앞에 있음에도 가만히 있어야 하는 처지이지 않나. 독만 아니었어도 진작에 달려들었을 거다. 눈에 힘을 부릅 주고 노려보는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제노스는 그런 에르킨을 말없이 내려다본다. 불현듯 허리춤의 검집을 빼낸다.
"뭘......!"
그리고는 검을 검집채로 에르킨한테 던진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에르킨의 눈앞으로 검집이 미끄러져 당도한다.
"들어라. 다시 한 번 나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
"아니면, 그렇게 땅바닥을 기는 상태로 죽고 싶나? 그렇게 하고 싶다면 내가 직접 죽여주지."
"... 하......"
웃음이 나온다.
"하하, 하...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 상황이 짜증나기 그지 없다. 실력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을 꼬맹이가 자신을 얕보질 않나, 황자라는 자리가 존귀하기라도 한 양 명령과 하대를 해대질 않나. 그리고 거기에 맞춰야지 살아남을 수 있는 자신의 처지도 화가 난다. 그러나 이건 기회가 될 수 있다. 저것이 자신을 얕잡아볼 때야말로 반격을 성공시킬 수 있는 찬스다. 그렇다면 거리끼지 않고 써먹어줘야 하는 법.
에르킨은 칼자루를 입에 물었다. 늑대가 사냥감의 목숨을 끊듯 머리를 털자 검집이 떨어져 나갔고, 그 상태 그대로 목만 돌려 팔목 밧줄 쪽에 칼날을 비집어 넣었다. 마비된 사지가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 살갗에서 피가 흐른다. 하지만 괘념치 않는다, 자유로워진 손으로 발목의 밧줄도 잘라낸다. 바르작거리며 몸뚱아리를 겨우 일으키자니 오른손에 들린 칼이 사정없이 떨린다. 거친 숨을 내쉰다.
"......"
"그래. 그 눈이다."
에르킨의 눈은 타오르는 듯했다.
"그 눈이 내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내달렸다. 귀를 찢을 듯한 파열음이 울리고, 맞댄 두 검날에서 붉은 불티가 튀었다. 삐걱이는 대치 상태가 이어진다.
"이런 감정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군. 뭐라고 명명해야 할지 아리송할 정도다... 희열, 쾌감? 아니면 해방감...?"
"......"
"확실한 건, 네놈은 나와 동류다. 맞댄 검을 통해 느껴지지 않나?"
에르킨이 힘을 주어 제노스의 칼을 밀쳐냈다. 두어 걸음 물러난 제노스를 향해 칼을 힘껏 휘둘렀다.
"뭐래 씨발!!"
어서 저 입을 다물려야 한다, 그 일념 하에 이루어진 공격이었다. 한 합. 공방이 무사히 이루어진다. 두 합. 검을 내리치던 와중 에르킨의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태세가 무너지고 제노스가 들어올렸던 칼은 의도한 궤적 그대로를 따른다. 에르킨의 상체가 크게 베인다.
"큭......!"
"하지만 이래서야 죽이는 보람이 없군."
어깨를 감싼 채 주저앉은 그대로 숨을 몰아쉰다. 이토록 짧은 공방이었음에도 지나치게 힘이 많이 들어갔다. 분하다는 감정을 가득 담아 자신한테 다가오는 제노스를 올려다봤다.
당장이라도 저 녀석의 목을 따버려야 하는데.
제노스는 에르킨의 목을 내리치지 않았다. 검 끝으로 턱을 들어올려 자신의 눈을 마주보게 했다.
공교롭게도 제노스의 눈동자는 에르킨과 같은 푸른색이다.
"사흘이다. 사흘 뒤, 나를 다시 찾아와라."
제노스는 에르킨을 죽이기 위해 데려왔다.
"그동안 몸을 충분히 회복시켜라.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를 베어버릴 것이다."
"......"
"너무 쉽게 죽어버리면 시시할 테니."
혹사당한 몸뚱이는 얄궂게도 때이른 수면을 급하게 청한다. 억지로 부릅 뜬 눈이 서서히 감기고, 피를 많이 잃은 몸뚱아리가 앞으로 쓰러진다.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도 에르킨은 제노스의 얼굴을 눈에 새기고 있었다.
한 번 정한 사냥감을 놓치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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퍽. 내 뒤통수로 돌멩이가 날아왔다. 뜨끈한 피가 뒷목을 적시고 등 뒤에서 낄낄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나한테 돌을 날린 군인들이다.
"병신 새끼. 안 피하고 그대로 맞는 것 좀 봐."
"안 피하는 게 아니라 못 피하는 거 아니냐? 야만족 새끼가 그럼 그렇지."
'죽일까?' 살인 충동이 습관적으로 목젖을 치고 올라왔다. '1분 안에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번에는 불타는 감정의 맛을 꽤 오랫동안 음미하다가 군인들한테서 시선을 피했다. 지금은 아니다, 나 혼자만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노역장에 혹사당하는 노역꾼들이 아주 많았다. 내가 보복을 했다가 괜히 다른 사람들한테 불똥이 튀면 안 된다. 이걸 두고 우리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느냐고.
무시하자, 무시. 짜증나는 군인들을 무시하며 포대기들이나 마저 들처업기로 했다. 그러자 무리 중 몇 명이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야. 쌩까냐?"
"⋯⋯."
"귀가 안 달려서 소리도 못 들어? 이거 완전 덜떨어진 놈이네?"
"실실 쳐웃고 있는 것 좀 봐. 대가리 쳐맞아서 맛 간 거 아니냐."
왜 나한테 지랄이실까요들. 이라고 말하면 안 되겠지. 사실 유난히 나만 건들려 하는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간다. 안그래도 보기 드물고 이질적으로 생긴 아우라족인 데다가 여기에 입소했을 때부터 몸이 거의 반송장인 상태였어서 그럴 거다. 여기 끌려온 사람들이 어디 한 군데 성치 않은 거야 흔한 일이라지만 나만큼 심각한 부상을 달고 있는 건 또 드물다는 말을 들었다. 요컨대, 괴롭히기 만만해보여서 찍혔다는 거다. 지긋지긋한 갈레말인들.
비속어를 속으로 삼키며 저들의 말에 나긋나긋하게 대꾸해준다. 적당히 맞다보면 알아서 떨어지겠지.
"저한테 볼일이 있으실까요?"
"이 새끼가. 다 들리면서 안 듣는 척 했네? 어? 우리가 만만해 보였나보다?"
"짐승놈이라 그런지 지금 상황 파악이 잘 안 되는 모양인데⋯⋯."
야만족인지 짐승인지 하나만 해줬으면 좋겠다.
"멍청한 개새끼는 상하 관계를 똑바로 가르쳐줘야지."
군인 무리 중 한 명이 칼자루로 내 배를 툭툭 찔렀다. 하필이면 얼마 전에 다쳤던 부위라 원하지 않아도 신음이 저절로 나왔다. 아마 알고서 일부러 상처를 때리고 있는 거겠지? 나쁜 놈들이라고 속으로 욕하면서도 그들의 욕구에 맞춰 아프고 약한 척을 해주었다.
나와 같은 처지의 식민지 징용병들은 저마다 무거운 짐을 서너씩 들쳐업은 채 멀찍이 내 옆을 지나간다. 그들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지만 아마 저들은 나한테 눈길도 주지 않으려 할 거다. 괜히 군인들과 눈이 마주쳤다가 자신이 휘말려들면 당장의 목숨을 장담하기 힘들 테니까. 이런 상황이니 도움을 기대하는 건 옳지 않고, 적극적으로 괴롭힘을 없애기 위해 움직이기도 애매하다. 그저 이유 없는 괴롭힘이 멈출 때까지 내가 참을 수밖에⋯⋯.
"눈 깔아."
개머리판이 내 정수리를 친 것과 노역장 문이 열린 건 거의 동시였다. 노역장 이곳저곳에서 작은 소란이 일고, 나를 괴롭히느라 정신이 팔려 손님이 온 것도 모르고 있던 군인들이 뒤늦게 손님한테 반응했다.
"헉! 제, 제노스님!"
"제노스님께서 무슨 일로 이 곳에!"
급하게 자세를 바르게 하고 경례를 하는 군인들 사이로 모습을 보인 건 덩치만 큰 갑옷을 입은 노란 머리 애송이, 제노스였다.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꼬맹이한테 다 큰 성인 장정들이 쩔쩔매는 게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제노스를 노려보며 경계하는 가운데, 제노스는 근처의 군인들한테 눈길도 주지 않는 채 느긋한 어투로 말을 받았다.
"내가 여기에 오면 안 되기라도 하나?"
"아닙니다! 이 제국의 모든 대지가 제노스님을 위한 것입니다!"
"헌데 내 말을 듣지 않는 자가 있는 듯 하군."
제노스는 나를 보고 있다.
망할.
"몸이 다 낫거든 찾아오라고 하지 않았나?"
미칠 듯이 물어뜯고 싶었다. 저 자식이 말하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반박하고 물고 늘어져 토론이라는 이름의 싸움을 대판 벌이고 싶다. 아니, 사실, 그 전에 저 자식의 대가리를 한 대만 후릴 수 있으면 원이 없을 것 같다! 시간과 장소라는 걸 가릴 줄 아는 내가 힘겹게 분을 삭이느라 가만히 서있기만 하려니 간도 큰 말단 한 명이 제노스의 질문 아닌 질문에 대답했다.
"하, 하지만 제노스님. 이 자는⋯⋯."
멍청한 군인의 용기는 제노스의 눈빛 한 번에 사그라들고 말았다. 아마 내가 징용병이자 죄수인 입장이니 이 시간에는 노역을 하고 있어야 한다, 뭐 그렇게 말하려고 했었겠지?
"⋯⋯ 그러고보니⋯ 이 자들한테 맞고 있더군."
"⋯⋯."
"겨우 잔챙이한테 당할 실력은 아닐텐데⋯⋯ 그 사이 솜씨가 녹슬기라도 했나?"
제노스가 옆에 있던 군인의 허리춤에서 칼을 빼내 나한테 던졌다.
"확인해보마. 검을 들어라."
여전히 저 새끼는 싸가지가 없다.
"제노스님, 제노스님과 검을 맞대기에는 저런 미천한 야만족은⋯⋯"
"내가 싸우겠다고 누가 말했지? 싸우는 건 너다."
"예?"
"굳이 말로 해야 알겠나? 저 자가 나와 검을 맞대기에 충분한 자인지 자격을 확인하겠다는 거다⋯⋯. 네놈을 다섯 합... 아니... 세 합 만에 목을 벨 수 있는지 봐야겠어."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말을 더듬는 군인의 모습이 이제는 애처롭게까지 느껴진다. 저런. 그러니까 마음을 곱게 먹지 그랬어.
얼결에 복수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 물론 제노스는 나를 괴롭힌 놈한테 복수할 기회를 마련해주겠다는 기특한 생각 따위 전혀 갖지 않았을 거다. 초장에는 나도 살짝 의심을 하긴 했는데⋯ 보기만 해도 짜증이 솟는 저 낯짝을 보면 알 수 있다. 제노스는 정말로 내가 부상 때문에 싸울 수 없는 상태인지 확인해보고 싶은 거다. 내 뿔을 걸 수 있다.
그런데 그거 아는가?
나는 저 꼬맹이가 마련해준 기회 따위 죽어도 받고 싶지 않다.
"제노스님. 저를 향한 의심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제 곧 제노스님께서 감사하게도 마련해주신 대련을 수행해야 하는 바, 아직은 부족한 몸이 이번 전투로 인해 제노스님과의 일합에서 본 실력을 다 내지 못 할까 심히도 저어됩니다."
"⋯⋯."
"그러니 부디 넓은 아량을 베푸시어 명령을 거두어주시고 제노스님과의 대련에 온 신경을 쏟을 수 있도록 해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실망할 일 없도록 최선을 다 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제노스도 나름 황족이라니까 알겠지. 방금 한 말은 '응 안 해' 라는 뜻이다. 내 말 뜻을 알아들었는지 제노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왜 존댓말을 하지?"
⋯⋯ 못 알아들었냐?
"죄송하지만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왜 나한테 존댓말을 하느냐고 물었다."
"⋯⋯ 제가 어찌 하늘과도 같은 갈레말 제국의 황자님께 무례를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마음에 안 드는군."
어쩌라고. 내가 반말하면 여기서 바로 온몸에 숨구멍 나는 거 모르냐?
"뭐, 됐다. 나도 이런 곳에서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다. 한 시라도 빨리 검을 맞대고 싶은 마음은 우리 둘 다 같은 듯 하니⋯⋯."
"⋯⋯."
"⋯ 따라와라. 이번에는 더 좋은 장소를 마련해두었다."
갑옷 부위끼리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제노스가 먼저 자리를 떠났다. 나는 주위의 눈치를 보다가 제노스의 뒤를 급하게 따라갔다. 아무리 눈치 파악이 느린 나라도 노역장의 분위기가 이전과 달라진 게 느껴진 탓에 선뜻 움직이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이번 사건 때문에 미래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는데, 뭐,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복잡한 일은 나중으로 미뤄두기로 했다.
⋯⋯ 그리고 바로 다음날부터 나는 노역장에 끌려가지 않게 되었다. 텅텅 비어 나 혼자 남은 감옥 안에서 헛웃음을 흘렸다. 이거 아무래도, 나, 제노스의 깔로 인식된 것 같지.
"진짜 시발 다 죽여버려⋯⋯."
제노스랑 엮이면 뭐 하나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다.
이번에 생긴 습관적인 살인 충동은 오랫동안 품 속에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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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이후로 에르킨은 하루가 멀다하고 제노스한테 불려 나갔다. 에르킨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황자라는 놈이 원래 다 이런 건가? 귀하디 귀한 옥체에 흠집이 나면 천지가 뒤집힐 듯이 날뛰는 세습귀족과 제노스는 달랐다. 얼마나 부상을 입든 상관 없이 전투에 만전을 가하고는 했다. 마치 자신이 이 곳에서 죽어버려도 상관없다는 듯이.
그리고 그건 에르킨도 마찬가지였다.
"윽......!"
척추를 훑고 지나가는 짜릿함이 있다. 이는 전투의 희열을 비유한 표현이 아니다. 죄수의 표현임을 증빙하는 초커에서 고압 전류가 단번에 방출되었고 에르킨은 속절없이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제노스의 부상이 일정치에 다다르거든 대련장을 감시하던 시종이 초커로 신호를 보낸다. 오늘의 대련은 여기서 끝이다, 라고.
당초에는 전기를 맞든 말든 전투를 이어가려고 했었다. 죽을만치 아팠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그 결과 에르킨은 전투 중간에 기절해버려 며칠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일어나자마자 바로 제노스한테 불려가서 또 싸우고 또 기절하고... 그것이 몇 번 반복되고서야 에르킨은 포기했다. 살짝 짜릿한 알람이라 생각하면 편했다.
목에 겹겹이 쌓인 화상을 메만지는 에르킨을 제노스는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검집에 검을 집어넣는 행동에서 미련이 묻어나왔다.
"또 부르지."
"그러시겠지."
에르킨이 습관처럼 비아냥거렸다. 이 정도로는 움찔하지도 않는 걸 알고 있다. 초커에 연결된 쇠사슬에 끌려 대련장을 나가는 에르킨한테 제노스가 말을 걸었다.
"내일은 검술 수련을 받을 예정이다만 참석하고 싶나?"
"수련? ... 어차피 나랑 치고박고 싸우는 거잖아? 나한테 선택권이 어디 있어."
제노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검술 선생을 새로 하나 구했다. 나한테는 질이 낮은 교본밖에 없거든."
'질이 낮은 교본'이라 할 때 제노스는 에르킨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감히 나한테서 칼 쓰는 법을 훔쳐가려 한 건가, 에르킨이 눈살을 왈칵 찌푸렸다. 어쩜 이렇게까지 건방질까!
"그거 기대되는데...!"
송곳니를 드러내며 입꼬리를 한껏 찢는다. 이미 한바탕 싸우고 난 뒤면서도 당장 2차전을 시작할 것만 같은 기세다.
"어디 한번 해봐. 날 죽일 실력이 되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보자고!"
효과는 발군이었다. 도마인 선생을 들인 이후로 제노스의 발전 속도는 날개를 단 듯 했다. (식민지에서 차출한 인력이라는 말을 듣고 에르킨은 혀를 찼다. 제국이란!) 에르킨의 수를 읽지 못 한 게 언제냐는 듯 칼을 맞받아치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 이제는 까딱 잘못했다간 공세의 주도권이 제노스한테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건 정말 놀라운 성장이었다! 웬만한 사냥꾼들도 에르킨한테서 우위를 점하기는 힘들었다. 그걸 지금 이 열네살 꼬맹이가 해낸 것이다.
신체는 힘들었으나 정신은 괴롭지 않았다. 지하 감옥의 차가운 바닥도 버틸만 했다. 대련장에서 잔뜩 흘린 땀을 식히는 데에 돌바닥이 도움이 되는 면도 있었다. 산악지대에서 생포되었을 때 걱정했던 것과 달리... 이곳 생활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감옥 바닥에 몸을 옹송그리며 천천히 눈을 감는다. 제노스가 비책을 하나 생각해 냈다던데 그게 무얼까? 결정력이 약하다는 제노스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기술일까? 아니면 특유의 추진력을 더욱 살리는 계책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 없었다, 에르킨은 양쪽 모두가 즐거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일 제노스가 어떤 걸 보여줄지 정말 기대된다.......
"......."
에르킨이 눈을 홉뜬다.
내가 방금 뭐라고 생각한 거야?
"...... 기대된다고?"
제노스와 싸우는 것이 즐겁다고 했나? 내가? 제국으로 인해 가족도 고향도 잃어버린 자신이, 제국의 황자와 보내는 시간을 재밌어 했다고?
내가 감히 즐거워할 자격이 있나?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입꼬리를 쓸었다. 어느샌가 입꼬리 끝이 슬그머니 올라가 있었다. 에르킨은 웃고 있었다. 제노스와 함께 있는 게 재밌다며 행복해하고 있었다......
"아니야!"
쾅.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아냐! 그렇게 느낀 적 없어!"
다시 한 번 더. 아릿한 통증으로 벌을 대신한다. 제노스는 에르킨이 분노를 느껴 마땅한 상대다. 또한 분노를 느껴야만 하는 상대이기도 하다. 수탈과 탄압에서 이득을 얻는 침략자, 평화를 깨부순 잔해 위에서 영화를 누리는 족속, 이웃의 시체를 밟으며 걸어왔을 학살자...
그런 상대와 싸우면서 희열을 느껴서야 마치 짐승과도 같지 않은가.
"우... 웩,"
한번 인식하기 시작하자 거부감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결국 참지 못 하고 속을 게워낸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불의를 멀리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인간처럼 살아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자신 또한 자신을 거두어둔 그들처럼 선과 정의를 위해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고, 그렇게 살아야만 했다. 에르킨은 짐승이 아니었으니까.
"께헥, 흑."
역겨운 자신을 밀어내기 위해 신체는 계속해서 내면을 밀어냈다. 간수 하나가 창살을 쿵쿵 치는 소리가 들렸다. 반복되는 강도 높은 노역에 밤새 앓는 식민지인은 많다, 저 간수도 곧 관심을 잃고 떠나갈 거다. 그리고 남은 자리에는 무엇 하나 성치 못 한 사람들이 사지를 널브러뜨리고 있겠지.
심하게 떨리는 온 몸은 도통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에르킨은 양팔을 감싸안은 채로 상체를 일으켰다. 그래, 에르킨은 저들과 함께 해야 했다. 제노스같은 타도해야 할 악이 아니라.
---
다음날, 제노스의 방으로 다시 불려갔을 때. 지난날의 다짐을 공고히 할 수 있는 소식을 하나 들었다.
"그 남자는 죽었다."
손바닥에 유난히 심한 상처가 나있길래 그에 대해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 이렇다. 제국인이 선천적으로 쓸 수 없는 '검격'을 따라하기 위해 손에 에테르 크리스탈을 박아넣었고, 그 결과 검술 선생을 이길 실력을 갖추게 되어.
그래서 죽였다고 했다. 제노스가 이길 수 있었으니까, 죽었다.
"...... 죽일 필요까지 있었어?"
검날을 햇빛에 비추어보던 제노스는 날에 반사된 에르킨의 상을 눈에 담았다. 몇 날 며칠을 함께 한 상대에 대한 정이라곤 느껴지지 않는다.
"어리석은 질문이군. 죽일 이유가 있던 게 아니라 죽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을 뿐."
"...... 죽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고."
"나는 그 자와의 싸움에 목숨을 걸었다. 넘지 못 할 벽을 뛰어넘기 위해 말 그대로 온몸을 갈아넣었지. 죽을 각오로 전투에 모든 걸 쏟아부었고 그 결과 누군가가 목숨을 잃었다... 당연한 결과 아닌가."
"......"
제노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네놈이라면 이해하고 있을 텐데."
이해할 수 있었다. 결코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에르킨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턱은 아래로 잡아당겨졌고 오랫동안 자르지 못 한 머리카락은 그의 두 눈에 음영을 드리웠다. 느릿한 속도로, 그는 검집을 잡았다.
"...... 제노스."
검은 검집에서 빠져나오지 않았다. 허리춤을 벗어난 검집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에르킨의 손을 벗어난 검을 빤히 바라보던 제노스는 이내 시선을 에르킨의 얼굴로 돌렸다.
"나는 너와 싸우지 않을 거야."
"... 검을 들어라."
"너와 싸우지 않겠다고 말 했어..."
에르킨이 힘없이 팔을 늘어뜨렸다. 제노스가 칼을 빼들었다. 날카로운 금속질 소리가 선연하다.
"무기를 들어라, 에르킨 파호드."
에르킨은 움직이지 않았다. 칼끝을 겨눈 제노스가 돌진해올 때조차도, 그저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나와 싸우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푹. 살덩이를 관통하는 불쾌한 감각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그럼에도 에르킨은 신음 하나 내지 않았다. 깊이 가라앉아 도리어 굳게 굳은 눈동자만이 제노스를 향할 뿐이었다.
"그럼 죽이든가. 검술 선생님한테 그랬던 것처럼."
"... 이해할 수가 없군. 그 자의 죽음이 네놈이랑 무슨 상관이란 말이지?"
"내 눈앞에 있는 게 갈레말 제국의 황자인 이상 관련이 없을 수가 없을 거야."
칼을 털어내듯 빼내자 옆구리가 크게 베인다. 후두둑, 피가 비오듯이 쏟아진다. 에르킨도 사람인 이상 고통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어, 저도 모르게 비틀거리며 두어 걸음을 물러난다.
"그따위 시시한 것에 연연하지 마라. 신분이니 정치니 하는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그저 허울에 불과하단 말이다......!"
어금니가 뿌득 갈린다. 고통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구분할 수 없다. 눈앞이 시뻘개지는 걸 고스란히 느끼며 에르킨이 배에서부터 소리를 끌어올린다.
"그렇다면 버려보든가...! 네가 나를 옆에 둘 수 있던 것도, 강해지기 위한 수단을 고르고 쓸 수 있었던 것도 전부 다 잘난 황자라는 직위 덕분이잖아! 어디 한번 그걸 모조리 버리고 흔적도 없이 불태워 보라고! 보나마나 시도도 못 할걸!"
"... 상대할 가치도 없는 말이군."
"왜냐하면 너희가 탐욕에 찌든 짐승이니까──!!"
크게 치켜든 검이 에르킨을 길게 찢는다. 검의 궤도, 칼날의 각도, 힘의 세기가 모두 속속들이 읽혔지만, 에르킨은 그저 밀쳐지는 대로 넘어지기만 했다. 그것이 옳은 선택이라고 믿었다. 피웅덩이가 에르킨의 옷을 서서히 물들여갔다.
천천히 에르킨의 머리맡으로 걸어온 제노스는 검끝을 에르킨의 눈 앞에 겨눴다.
"마지막으로 말하겠다. 무기를 들고 나와 싸워라."
에르킨의 푸른 눈이 제노스를 응시한다. 무언가를 열망하는 눈이었으나 그것이 코 앞의 피냄새는 아닐 터였다.
"... 내 말대로 해준다면 얼마든지."
네 특권을 포기하지 않겠다면 죽여라. 말에 담긴 속뜻을 제노스 또한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대치를 먼저 그만둔 쪽은 제노스였다. 한참을 가만히 서 있던 그는 말없이 발을 돌렸다. 얼마 안 가 시종 몇 명이 방에 들어와 에르킨을 끌고 나갔다. 그 날의 만남은 그것이 끝이었다.
한동안 제노스는 여지껏 그랬던 것처럼 에르킨을 자주 불러세웠다. 그리고 그 때마다 제노스는 칼을 들었으며, 에르킨은 바닥에 누웠다. 언젠가는 외압에 의해 억지로 쓰러졌던 에르킨이었으나 이제는 다르다. 에르킨은 스스로의 의지로 싸움을 그만두었다. 그저 제노스가 자신을 죽이지 않는 이유를 의아하게 여기기만 하며, 모든 욕망 추구의 행동을 멈춰버린 것이다.
그런 날이 반복되자 호출 빈도는 차츰 줄어들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번이 한 달에 한 번으로, 그것이 분기 별로 늘어졌다.
제노스를 모시는 시종들에겐 그것이 참으로 골칫거리였다. 다른 죄수들처럼 노역으로 부려먹자니 제노스의 눈치가 보이고, 이전처럼 가만히 놔두자니 제노스가 가지고 노는 횟수가 적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계륵같은 입장이 되어 에르킨은 살아갔다.
그것이 수 년이었다. 오래토록 이어질 것 같았던 생활은 어느 날을 기점으로 끝이 났다.
지상으로 추락한 붉은 달, 제7재해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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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내기 시절 리베리우스는 지금보다 더 싸움꾼이었습니다 | 신생 | 잡담방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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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리우스는 천구의를 집어넣었다. 어딜 가나 질 낮은 양아치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괜히 다툼이 커지기 전에 무사히 해결되어서 다행이었다. ... 다행이라기에는 리베리우스의 속은 부글부글 끓는 중이었지만.
"저, 저기. 덕분에 살았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억울하게 시비가 걸렸던 행인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하는 모습에 리베리우스는 웃는 얼굴을 가장해냈다. 죄 없는 사람 앞에서 화내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겉치레 인사가 몇 번 오가고 싸움 구경을 왔던 인파와 함께 여성은 가던 길로 사라졌다.
보람이 느껴지나? 잘 모르겠다. 해야 할 일을 했다는 감상 뿐이 남았다.
사막 도시 울다하의 공기에 리베리우스의 한숨이 더해질 무렵이었다...
"또 한 건 해결했구나!"
"안녕~!"
싹싹한 휴런*과 까칠해 보이는 라라펠*²이 리베리우스한테 아는 체를 하며 다가왔다. 리베리우스는 그들의 목에 있는 문신을 흘금 보았다.
( *휴런: 현실의 인간과 가장 비슷한 종족.)
( *²라라펠: 평균 신장이 100cm가 안 되는 난장이 종족.)
"누구시길래 저한테 말을 거십니까?"
"또 그런다. 우리랑 같이 몇 번 싸워보기도 했었잖아? 그리다니아에서!"
휴런 여성이 짐짓 상처받은 체를 하며 과장되게 손을 흔든다. 그녀의 목, 그리고 라라펠 남성의 목에는 붉은색 문신이 있다. 샬레이안에서 인정받은 지식인만이 수여받는 현인의 문신이다. 그 말은 두 사람이 리베리우스와 같은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와 동시에 리베리우스가 반길 필요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란 뜻이기도 하다.
리베리우스가 환하게 미소짓는다.
"전혀 기억나지 않네요. 이제 우리 서로 갈길 갈까요?"
"대체 왜 이렇게까지 우릴 고깝게 보는 거야? 우리 너한테 뭐 했어?"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들썩이는 라라펠한테 웃음 지은 침묵으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저 사람들 입장에서는 리베리우스의 샬레이안 기피가 부당한 차별로만 보일 것이다.
"... 뭐, 아무튼 이야기 좀 들어봐. 너한테도 나쁜 제안은 아닐걸?"
"제안이라고요."
"네가 가진 능력인 '초월하는 힘'. 네가 지금껏 봐왔던 '환상 말인데... 그 정체가 궁금하지 않아?"
"......"
리베리우스의 입꼬리가 굳었다. 이들 앞에서 휘청이는 모습을 보인 게 패착이었다.
어머니 크리스탈의 환영을, 수없이 쏟아지는 유성우를 보고난 뒤부터 리베리우스는 환상을 자주 보고 있었다. 저 라라펠이 말했던 대로. 아니, 그것을 환청이라고 불러도 될까? 찢어질 듯한 두통과 함께 눈 앞이 뒤집어지고 나면 실제로 벌어졌던 과거를 마치 지금 체험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여다보곤 했다. 방금 전 물건을 훔쳤다는 누명을 써 시비가 걸렸던 행인의 무고를 밝힐 수 있던 것도 이 '정체불명의 힘' 덕분이었다.
약점을 잡고 자신을 쥐어 흔들려는 건가? 그렇게 리베리우스가 경계하는 모습을 본 휴런 여성이 쾌활하게 웃었다.
"긴장하지 마! 우린 그저 너하고 같은 힘을 가진 사람을 소개해주고 싶을 뿐이야. 겸사겸사... 그 사람과 함께 추진하고 있는 계획을 도와주면 더 좋겠지?"
"네가 힘을 빌려준다면 대신 우리는 네가 모험가로서 활약할 수 있도록 지원해줄 수도 있어. 지금부터 모험가 길드에 보고하러 갈 거지? 모래늪에 있는 모모디한테 얘기해 뒀으니, 관심 있으면 이야기를 한번 들어봐."
"우리는 비밀조직 '새벽의 혈맹' 사람이야. 정의의 사도 비슷한 거라고나 할까!"
두 팔 활짝 벌려 활기차게 말하는 휴런. 그를 보며 리베리우스는 참 웃기다는 듯한 웃음을 흘렸다.
"비밀조직이면 이런 곳에서 큰 소리로 존재를 밝히면 안 돼요."
그들이 지금 있는 곳은 도시의 광장 한복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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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리베리우스는 그들의 아지트에 찾아갔다. 지원이라는 말에 뿔이 솔깃했기 때문이다.
라라펠 접수원을 깜짝 놀라게 해 뒤로 넘어뜨리는 작은 사고가 있기는 했지만 무사히 안으로 입성할 수 있었다. 건조한 사막 지대에 위치한 '모래의 집'은 실내 바닥을 딛어도 모래 알갱이가 버석버석 묻어나왔다. 들이마시는 숨에 까슬함이 느껴지는 것도 같아 깔끔함을 좋아하는 리베리우스한테 썩 기분 좋은 공간은 아니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이곳 사람들이 자신을 반기는 게 눈에 보였다. 리베리우스는 그것이 참 생소했다.
"아, 자네가 그 유명한 리베리우스로군! 우리 맹주님이 기다리고 계시네."
문지기가 새벽의 방 문을 열어주었다. 리베리우스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 그 곳에는 간부처럼 보이는 인물들 여럿과 맹주 자리에 서 있는 여성 한 명이 모여 있었다. 그들 모두가 리베리우스를 바라보았다. 금발을 틀어올린 여성이 두 팔을 벌려 리베리우스를 환영했다.
리베리우스는 습관처럼 그들의 목덜미를 훑었다.
"당신이 소문으로만 듣던 그 모험가로군요? 나는 민필리아예요. '새벽의 혈맹'을 이끌고 있죠. 기다리고 있었어요."
"......"
미소만 지은 채 입을 다물고 있으려니 자신을 민필리아라고 소개한 이가 눈웃음을 지었다. 일방적인 대화를 이어나가기를, 새벽의 혈맹은 에오르제아를 수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다. 여러 '벽'을 초월할 수 있는 '초월하는 힘'을 가진 자들이 새벽의 혈맹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에오르제아가 당면한 문제인 야만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을 빌려달라...
"사실 나도 당신하고 똑같은 힘... '초월하는 힘'을 지닌 능력자예요. 우리가 가진 '초월하는 힘'은─"
"그래서 나에 대해 알고 있었군요."
민필리아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가 하는 말이 별 영양가가 없다는 태도다.
"초월하는 힘에 대해 그렇게 자세히 아시는 걸 보면 발데시온 위원회에서 온 사람같은데..."
"......"
"아버지께서 저에 대해 말하던가요?"
제 팔을 감싼 모습에서 경계와 불쾌함이 여실히 느껴진다. 민필리아는 당황을 눈꺼풀 뒤로 숨기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짐작하신대로, 새벽의 혈맹은 발데시온 위원회와 깊은 인연이 있어요. 물론 당신의 아버님과도 많은 대화를 나눴었고요. 아버님께서 아드님을 많이 그리워 하시더군요."
"이상하네요. 내 이야기를 아버지께 들었다면 내가 이 모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건 짐작하셨을 텐데요. 아버지께서 나를 지나치게 많이 포장해주셨나?"
"리베리우스...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줘요."
"샬레이안의 현인들을 이렇게 바글바글 모아두고 이야기하면 내가 기뻐할줄 알았나봐요."
모험의 시작부터 만났었던 두 명의 불청객을 포함해, 이 곳에 모인 다섯의 간부는 모두 빠짐없이 현인의 문신을 달고 있었다. 리베리우스 또한 샬레이안의 대학에서 공부를 했던 적이 있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북해를 나와, 동방 대륙을 여행하고, 에오르제아의 실태를 듣고 느끼며 생각한 바로는... 리베리우스는 샬레이안을 좋아할래야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었다.
"샬레이안에서 독수공방하던 늙은이들이 이제서야 좀 사람을 움직일 생각이 들었나보죠? 지금껏 안전한 곳에 틀어박혀 있다가 그 잘난 에테르 측정기를 들여다보고는 이거 좀 위험하겠단 예감이 드니까 부랴부랴 대책을 세우려고요?"
"오해가 있는 것 같네요."
리베리우스가 왼손으로 관자놀이를 규칙적으로 두드린다.
"야만신 문제. 그래요. 에테르를 심각하게 고갈시켜서 환경을 비가역적으로 파괴한단 점에서 문제가 맞다는 걸 인정해요. 하지만 에오르제아가 당면한 문제가 그것 뿐이라고 생각해요? 훨씬 더 시급한 문제가 산재하지 않았어요? 일례로 난민 문제는 어떻고요? 알라미고에서 탈출하는 사람들은 가장 가까운 나라인 그리다니아가 난민을 받지 않아 돌고 돌아 더 먼 울다하로 이동하고 있어요. 탈출 과정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은 사람은 적절한 처치를 제 시간에 받지 못 해 목숨을 잃고, 겨우 울다하로 도착한다 하더라도 그곳은 이 이상의 난민을 받아들일 여력이 되질 못 하죠." "... 그것 또한 가슴 아프며 또 해결해야 할 문제예요." "이 에오르제아 대륙에서 실시간으로 사람이 죽어가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시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게 인간 개개인한테 무슨 도움이 되는지...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네요?" "심정은 이해해요." "시혜적인 시선은 집어치워요. 당신들이 정녕 에오르제아를 위한다면 심정만 이해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사람을 위하란 말입니다."
시야 구석에서 몇 사람이 고개를 숙이는 게 보였다. 리베리우스는 그 휴런 여성한테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다. 위선적이며 또 오만한 샬레이안 사람을 만나면 하고싶었던 말을 다 쏟아내느라 여력이 없었다.
그가 하는 말 또한 시기적절하지 않은 말이다. 본인이 이미 시인했던 대로 야만신 문제 또한 누군가가 해결을 해야 하는 문제였으며 대의를 가진 이한테 어째서 다른 곳을 쳐다보지 않느냐 따지는 건 논점을 벗어난 투정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리베리우스는 이를 스스로 깨닫지 못 했다. 세상 곳곳의 삶을 봐온 입장으로서 지식의 수호만을 외치는 전형적인 샬레이안인을 용서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 그래요. 인정할게요. 당신의 관심사가 진정으로 세상을 바꿀 한 수일지 모르고, 어쩌면 우리는 정세의 핵심을 짚는 게 아닐지도 몰라요."
"민필리아, 그 말은...!" 라라펠 남성이 맹주를 질책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서로를 도울 수 있을 거예요. 우리 새벽의 혈맹은 당신의 모험길을 돌봐줄 준비가 되어 있어요. 당신 또한 우리한테 힘을 빌려준다면 우리는 함께 서로가 원하는 길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거예요."
리베리우스가 환하게 미소짓는다.
"내 말을 어디로 들었는지 모르겠네요. 나는 우리가 가는 길이 다르다고 이야기를 한 거예요."
민필리아가 눈꼬리를 휘어 웃는다.
"서로 가는 방향이 다르더라도 발걸음을 응원해줄 수는 있잖아요?"
맹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민필리아는 리베리우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손익 계산을 거쳐 결론내려진 실리적인 판단일 것이라고 리베리우스는 추측했다. 사실이 어떻든 간에 민필리아는 제 뜻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리베리우스를 동료로 받아들이고 싶어했다.
"당신의 혜안이 새벽의 혈맹을, 더 나아가 에오르제아를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예요. 부디 우리 새벽의 혈맹과 함께 해주겠어요?"
".........."
리베리우스는 한 발 물러나기로 했다.
"뭐어, 솔직히 인정할게요, 당신들이 줄 수 있다는 '도움'이라는 데에 흥미가 있긴 해요. 나를 감시해왔으니 잘 알겠지만 지금은 무력도 자산도 없는 일개 모험가일 뿐인지라..."
잠깐의 휴식.
"... 판단할 근거가 필요해요. 너희가 이 상황에서도 본국에 처박혀있는 엉덩이 무거운 놈들이랑 질적으로 다른 족속이란 걸 납득해야 함께 하건 말건 할 것 같네요."
"그걸 위해서는 한동안 우리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겠네요. 안 그래요?"
"부정하진 않을게요."
"그렇다면 마침 딱 좋은 안건이 있어요. 울다하 총사령부 '불멸대'에서 지원 요청이 들어왔었는데..."
"벌써부터 사람을 부려먹으려고 하시네."
리베리우스가 비꼬는 말을 못 들은 척 하는 민필리아.
"울다하 담당자인 산크레드와 함께 다녀오는 걸 제안할게요. 그 전에 아직 여기 모인 사람들에 대한 소개를 안 했었죠? 이 쪽이 이번에 함께 하..."
"필요 없어요.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인 현인이겠죠. 내 동행이나 위쪽으로 올려보내세요."
리베리우스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새벽의 방에서 빠져나왔다. 문이 닫히는 사이, 문틈 너머로 자신에 대한 불평의 말이 튀어나오는 것 같았으나 리베리우스는 괘념치 않기로 했다. 이 사람들에 대한 불만을 내놓고 싶은 건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계단을 오르는 신발 밑창에는 여전히 모래 알갱이가 버석버석 밟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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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백은 아니고 이 사이 서사 정리 | 신생 | 잡담방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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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내용
이후로 리베리는 새벽의 혈맹과 '협력 관계'를 유지합니다. 혈맹에 들어가지는 않고 요청을 받으면 손을 보태고 보수를 받는 형식이죠. 같이 다니긴 하지만 동료는 아니라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면서 제국의 군단장 하나를 뚜샤뚜샤하기도 하고... 어둠(ㄹㅇ)의 세력을 뚜까뚜까하기도 하고... 그렇게 이름을 알리며 에오르제아의 영웅이 되어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위의 독백에서도 언급됐었죠? 새벽의 후원 조직인 발데시온 위원회가 적의 공격으로 궤멸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본부가 있던 발 섬은 소멸했고 위원회 사람들은 사실상 사망이나 마찬가지인 실종 상태가 됩니다. 그리고 리베리의 아버지는 발데시온 위원회 소속이었어요. 이 이후로 리베리는 한동안 샬레이안 본국과 에오르제아를 왔다갔다 하면서 정신없이 살아갑니다. 여차하면 본인의 이름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가를 남긴 채 자리를 비웠고, 야만신 토벌 의뢰를 받았을 때에만 잠시 들렀다가 다시 샬레이안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에오르제아 상황은 거의 살피지 못 했어요. 그러다가... 새벽이 음모에 휘말리면서 리베리가 에오르제아 연맹국 중 하나의 왕을 시해했다는 누명에 씌이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새벽은 뿔뿔이 흩어지고, 동료 몇 명은 (결과적으로) 목숨을 잃었으며, 리베리는 비전투원 하나와 열여섯 꼬마만을 옆구리에 낀 채 설국으로 망명을 갑니다. 이 시점에서 리베리는 자기성찰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본인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며 동료들이 희생하지 않았어도 된다고 자책을 정말 많이 했어요. 이전까지 정치 관련된 일은 새벽한테 맡기다시피 해왔었기에 본인이 잘못했노라 크게 반성을 합니다. 선두에 서서 전장을 살피겠다는 각오로 무기를 도끼로 바꾸고, 앞으로는 눈을 돌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할 무렵... 이하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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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백4 | 홍련 | 잡담방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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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내용
갈레말 제국은 붉은 달을 지상으로 떨어뜨렸다. 알데나드 대륙 전역을 초토화시킬 목적의 대규모 작전이었다.
불길이 치솟는 카르테노 평원은 아주 먼 거리에 떨어진 일사바드 대륙의 갈레말 제국 수도의 하늘 또한 붉게 물들였다. 솔 황제의 궁으로 피랍된 알데나드 출신인들은 때아닌 밤에 붉어진 하늘 방향으로 통곡했다. 저 곳에 우리 고향이 있다고, 신들에게 사랑받는 땅이 어찌 저런 시련을 겪을 수 있느냐고. 대지의 에테르가 시시각각 고갈되는 게 느껴졌다. 생명이 순식간에 꺼져감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울부짖음은 아무런 힘을 갖추지 못 했다.
망향의 울음 외엔 모든 것이 고요한 그 성에서 암약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비탄에 빠진 자들은 움직이지 못 할 것이요 비극을 탄생시킨 자들은 붉은 달에 온 신경을 쏟을 테니 발을 움직일 여력이 있는 사람들은 그 수가 적다.
그들은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앞서 걷는 자들이 길을 잘 찾을 수 있도록, 뒤따르는 자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묵묵히 다리를 빠르게 놀릴 뿐이다.
성을 빠져나가고자 하는 이들은 오사드 대륙의 각지에서 차출된 식민지 인력이다. 감시의 눈길이 없는 사이 핍박을 벗어나고자 발버둥친다.
"찾았다! 저기 있─"
성을 지키던 제국 병사 하나가 도망자 무리를 찾아냈다. 그러나 성과가 무색하게도 그의 목은 무딘 칼날에 강하게 꿰뚫렸다. 목구멍이 구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체 몸뚱이가 쓰러지는 소리는 밤의 어둠이 집어삼켰다.
에르킨은 허리춤에 검을 넣으며 무리의 맨 뒤편으로 합류했다.
'같이 가요. 청년.'
'... 제가요.'
그는 여러 해 동안 참으로 애매한 위치에서 살아왔다. 태자의 총애를 받는다기엔 무관심 속에 있으나 멸시받기엔 태자의 시선이 열렬하다. 때문에 에르킨한테 함부로 부역을 시킬 수 있는 간이 큰 간수가 드물었다.
'솔직하게 말하리다, 청년의 무력이 있으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내보낼 수 있을 거예요. 어린 아이들만이라도 이런 지옥 말고 바깥에서 살게 해야죠, 응?'
'......'
몇 년 동안 특혜 아닌 특혜를 일부러 무시했던 에르킨이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그것을 십 분 활용하기로 했다. 본인이 피난 무리의 가장 뒤에 있으면 제 사정을 아는 제국군이 잠깐이라도 머뭇거릴 수 있겠지. 그 찰나의 순간은 더 많은 사람이 도망치도록 만들어줄 것이다.
'... 무기가 필요해요. 뭐라도 좋아요.'
하여 에르킨은 기꺼이 검을 들었다. 누군가를 수호하기 위한 검은 아무 걱정 없이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붉은 빛을 받은 황궁이 보였다.
"............"
밤바람이 에르킨의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훑고 지나간다. 그는 힘들게 고개를 돌려 다른 사람들의 뒤를 좇는다. 수도 바깥으로 통하는 하수도가 코앞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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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그 날의 사변을 제7재해라고 명명하였다.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을 상흔이 알데나드 대륙에 새겨졌다.
갈레말 제국을 탈출했던 소수의 피난민들은 몇 개월의 행군 끝에 알데나드의 검은장막 숲에 자리를 잡았다. 숲의 모든 걸 관망하는 정령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 움직임이었다. 그들은 불가에 몸을 뉘이고, 열매와 물고기를 먹었으며, 얼마 안 가 집을 세우기 시작했다. 고향을 향한 사람은 촌락을 떠나고 머무를 곳을 찾는 피난민이 무리에 합류하자 그럴듯한 마을이 만들어지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름없는 피난민 마을에는 분명히 삶이 존재했다.
"싫어!!"
"어이쿠, 하나... 선생님이 이제는 진짜로 가봐야 해요."
"싫어!! 싫다고!!!"
에르킨 또한 그 곳에 머물기로 결정했었다. 몇 년에 걸친 피랍생활로 상한 몸을 보살펴준 마을 사람들에 대한 보답이었다. 어른들이 일을 하러 나가거든 크지 않은 나무집에 어린 아이들을 불러모아 글자 읽는 법과 셈을 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바쁜 어른들 대신 아이를 돌봐주기를 몇 년, 이제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에르킨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썩 나쁘지 않은 호칭이다.
에르킨의 꼬리에 매달린 이 아이 또한 에르킨이 기른 아이 중 한 명이다. 수업 내내 열심히 집중해주고 말썽 한 번 안 부리던 착한 아이었는데.
"선생님 가지 마!! 하나랑 계속 같이 있어!!"
"하하... 미안해요, 에르킨 선생님. 하나가 선생님을 너무 좋아해서..."
"어유, 괜찮아요 어머님. 하나는 씩씩하게 선생님이랑 안녕~할 수 있는걸요. 그렇죠? 하나?"
"싫어!!!!"
아이가 와앙-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에르킨이 정말 곤란하다며 웃었다.
어느 집단이나 돈은 필수불가결하다. 마을이 정착하고 운영이 본 궤도에 오르자 가장 중요한 문제는 생존에서 자금 확보로 바뀌었다. 숲에서 채집한 열매 따위로 장사를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고, 농사를 짓자니 해결하기 까다로운 여러 문제가 산재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시름에 빠져 있을 차에 에르킨이 하나 제안을 했다. 요즘 그리다니아 본국에서 모험가 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으니 본인이 모험가가 되어 돈을 벌어오겠다. 의뢰를 잘 받으면 단기간에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알고 있다고...
그렇다. 눈가가 벌개진 어린 아이한테 배웅을 받는 이 사람은 원래 돈을 벌기 위해 모험가가 됐었다. 그 중에서도 치유사는 희귀한 직종이라고 하니 수요가 많을 것이란 낙관적인 예측을 해보았다. 흐릿한 기억을 되살려 조악한 천구의를 만들고, 오랜만에 체내에 에테르를 순환시켜 별의 흐름을 받아들였다.
손에 익지 않은 천구의를 든 새내기 모험가가 세계의 영웅이 되리라고 예측한 사람이 누가 있었을까? 적어도 마을 사람들 중에선 없었을 것이다. 검은 비늘의 모험가가 에오르제아에서 제국 군단장을 몰아냈단 소문이 기어코 마을까지 도착한 날, 촌장은 까무러쳐 뒤로 넘어갔다.
리베리우스의 이름으로 모험가가 된 그는 많은 신의 목을 떨어뜨렸다.
제국의 군대를 에오르제아에서 퇴각시켜 평화를 되찾았다.
용의 분노를 사그라뜨려 천 년 간 이어진 전쟁의 종지부를 찍었다.
하나만 이루어도 영원히 화자될 업적을 수 년만에 산처럼 쌓아냈다. 도끼날에는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리베리우스의 어깨는 갈수록 무거워졌으며 발걸음 한 발조차 조심해서 내딛어야 했다. 리베리우스는 멈추지 않았으며 또 멈출 수 없었다. 세상이 그를 원했다. 별의 의지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힘을 가진 자는 사람들의 부름에 응답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렇게 그는 메마른 황야에 당도한다. 제국에 지배당한 나라, 알라미고가 위치했던 땅이다.
"거점을 정찰할 필요 없이 바로 무너뜨리면 되지 않아요?"
"관둬. 선전포고라도 할 셈이야?"
"농담이에요, 알리제."
피로가 짙게 내려앉은 눈을 한 채 농담이라고 해봐야 믿음이 가지 않는다. 알리제는 리베리우스를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튀어나가지 않을지 경계하는 눈치다.
"... 진짜 농담이라니까요. ...... 치러 갈 때는 알리제도 같이 데려갈게요."
"됐어! 누가 같이 데려가달라고 이러는줄 알아? ...... 나 두고 가면 재미없을줄 알아."
"하하!"
유쾌한 웃음을 참지 못 하고 크게 터뜨리자 저 앞에서 걷던 알피노가 두 사람을 돌아본다. 들킬 수 있으니 조용히 하고 작전에 집중하라는 눈치다. 알리제와 리베리우스는 두 눈을 크게 떠 모르쇠를 하며 서로한테서 고개를 돌렸다.
카스텔룸 벨로디나는 기라바니아 평원에 위치한 갈레말 제국의 보급 기지다. 알라미고 해방군의 거점과 맞닿아 있어 무력 충돌이 발생할 가능성이 큰 세력이기도 하기에, 리베리우스를 위시한 '새벽의 혈맹' 일동은 보급 기지의 동향을 살피기 위한 정찰을 나선 참이었다.
정찰 결과에 별 문제가 없다면 내일모레에 카스텔룸 벨로디나를 공격할 것이다. 저 기지가 무너지는 소리는 알라미고 해방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리라.
"...... 답지 않게 마음이 들뜨네요. 제국에 반격을 하는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거든요." "동감이야. 에오르제아의 나라들은 자기 잇속만 챙길 줄 안다고 생각했던 날이 엊그제같은데. 조금은 다시 보게 됐어. 알피노가 그랬듯이 에오르제아 연맹도 변화한 걸까?" "변화... 그러네요. 다들 좋은 방향으로 성장했어요."
리베리우스는 기지 건물보다 조금 더 먼 곳을 눈으로 좇았다.
"다들... 앞으로 나아가고 있네요."
"... 리베리우스?"
위화감을 느낀 알리제가 그를 불러세웠다. 자리에 멈춰선 리베리우스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 때였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커다란 대포 소리가 울려퍼졌다. 깎아내리는 절벽 너머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저 방향은 알라미고 해방군의 거점이 위치한 방향이다.
"저기 봐! 랄거의 손길 쪽에서 연기가 나고 있어!"
"이런... 링크펄 통신도 연결이 안 돼!"
먹통이 된 링크펄을 알피노가 몇 번이고 연결을 시도해보는 사이, 리베리우스는 고민 없이 뿔피리를 불었다. 동물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를 듣고 몇 마리의 수송용 가축이 달려왔다. 자신 몫의 초코보에 올라타며 리베리우스가 외쳤다.
"작전은 중단합니다, 랄거의 손길에서 동료들과 합류합시다!"
"알겠네!"
"그래!"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그들은 황야를 가로질렀다. 해방군 거점에 가까워질수록 매캐한 연기와 청린수 냄새가 지독해져 갔다. 좁은 언덕길을 지나자마자 제국군이 해방군을 베어 넘기는 모습이 보였다. 제국의 선제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막사의 앞쪽,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칼을 크게 휘두른다. 리베리우스를 포함한 사람들이 비명같은 외침을 내지른다.
"야슈톨라! 리세!"
"알피노, 빨리 치료하자!"
전투도끼를 꺼내든 리베리우스가 초코보의 등을 박찼다. 크게 도약해 아래로 내려찍는 공격은 투구를 쓰지 않은 한 병사 ─ 장교급인가? ─ 한테 막혔다. 리베리우스의 괴력을 견디지 못 한 칼은 튕겨나가고 본인의 다리는 주춤거렸지만, 이내 기세를 정돈하고 달려든다.
리베리우스가 시선을 잡은 사이 알피노와 다른 치유사는 포로를 구출하러 달려갔다. 칼을 맞댄 상대가 눈을 굴렸다.
"이런, 포로가!"
어금니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이어지지 못 했다. 가장 화려한 투구를 쓴 자가 두 사람한테 다가와서 말했다.
"포르돌라, 물러나라....... 너는 병사를 인솔해라."
리베리우스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투구 속의 저 목소리는 분명 기억에 있는 목소리였다.
포르돌라라고 불린 장교가 물러나자 도끼날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겨우 손에 힘을 주려니 떨림이 척추서부터 온몸으로 번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그것이 분노 때문인지 다른 감정이 원인인지 리베리우스는 알지 못 했다.
"호오.... 이런 곳에서 그리운 얼굴을 만날 줄은 몰랐군."
"...... 너, 설마...!"
제노스가 커다란 검집에서 칼 하나를 빼든다.
"이번에야말로 나를 즐겁게 해주겠지? 에르킨 파호드."
쾅 소리와 함께 주위의 전투 인력이 쓸려나간다. 에르킨은 갑옷 흉곽이 움푹 패인 채 기나긴 선을 남기며 먼 거리를 밀려났다. 뒤켠의 호수에 빠지지 않기 위해 박아넣었던 도끼를 다시 들어올린다. 그러면서도 에르킨의 동공은 닫힐 줄을 몰랐다. 온몸의 모든 세포는 저 자와 싸워야 한다고 자기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주위에 피냄새가 너무 많았다.
"왜 그러지?"
제노스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 겨우 해낼 수 있는 전부였다. 제노스를 저지해야 한다는 건 안다. 그가 이끌고 들어온 제국군에 의해 목숨을 잃은 동료가 너무 많다. 우리가 흘린 피가 이렇게나 많단 말이다.
"아직도 나와 싸울 생각은 없는 건가?"
그런데도 내가 제노스와 싸워서 기쁨을 느낀다면 어떡하지?
"여전히... 의미 없는 사상에 빠져 있나."
손이 떨린다. 팔이 떨린다. 이빨이 부닥친다. 위협을 물리치고 평화를 가져와 대륙을 구한 영웅은 결함을 가져서는 안 된다. 해방군의 정신적 우상이 사실은 적국의 총독과 다를 바 없는 인간말종이었다고 알려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겨우 잡은 해방과 독립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리베리우스는 약점을 보여져는 안 된다.
아니, 그 이전에, 에르킨은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져버리고 싶지 않았다......
"...... 시시하군."
참격 한 번에 리베리우스는 무릎을 꿇었고 다시 일어나지 못 했다. 일어나, 아직 싸울 여력이 있잖아. 리베리우스는 자신을 다그쳤으나 다리가 제 말을 듣지 않았다. 흥을 잃은 제노스가 병력을 이끌고 퇴각하는 뒷모습을 이를 갈며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지원 병력을 이끌고 온 아군 장교가 본인의 상태를 살피는 게 느껴졌다. 그는 리베리우스가 무릎을 꿇은 것이 압도적인 무력 차로 인한 부상이 원인이라 생각하는 듯 해서... 리베리우스는 피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는 여전히 열여섯 그 시절에 머물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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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내용
"자네, 어디 가는 건가?"
"... 알피노."
리베리우스가 우뚝 멈춰선다. 고개만 돌려 뒤를 보니 머리카락에 가려져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그가 두른 분위기는 알피노한테 늘상 보여주던 친애의 감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제노스를 습격하러 가나?"
"이미 잘 아시면서 굳이 여쭤보시네요."
"리베리우스...... 자네."
날카로운 태도에도 굴하지 않고 알피노는 자기가 해야 할 말을 다 한다. 그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믿었다.
"랄거의 손길에서 제노스와 맞선 이후 자네의 상태가 평소와는 다르네. 마치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듯이 조급해하고 있어. ... 왜 그러는지 물어봐도 되겠나?"
"조급해하는 이유요."
"그 날의 패배가 자네가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여기는 이는 아무도 없네. 자네가 원한다면 적절한 시기가 찾아왔을 때 다시 맞붙을 수 있을 걸세. 그 날의 설욕을 되갚아줄 수도 있을 테고. 그러나... 고우세츠와 다른 이들이 말했듯 지금은 적절한 시기가 아닐세. 자네 또한 잘 알고 있을 테야."
앞머리 아래의 푸른 눈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알피노는 그 눈동자를 직시하고자 노력했다.
"자네가 지금 이렇게 서두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모든 게 괜찮을 거라는 뜻일세."
"......"
리베리우스의 머리가 원래 가던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당장이라도 출발하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제 말을 시작한다.
"... 그동안 내가 너무 안일했어요. 제국과 정면으로 맞붙겠다고 다짐했다면 언젠가 제노스랑 마주하게 될 날도 오리라고 미리 예상을 해뒀어야 하는 건데. 나는 그럴 각오가 되어있지 않았고, 그 날에 도끼질 한 번조차 제대로 하지 못 했어요."
"누구라도 그럴 수 있을 걸세. 자네의 탓이 아니었어."
"내 탓이 맞아요. 그리고 실수는 바로잡아야만 해요."
리베리우스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알피노와 더 나눌 말이 없음을 몸짓으로 알린다.
"리베리우스! 서두르지 말게!"
"알아서 살아돌아올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알피노를 향해 손만 팔랑팔랑 흔들어 보인다.
"제노스를 죽이고 돌아올게요."
'그 때 그렇게 말했었지.'
리베리우스가 지난 전투를 회상한다.
'결국 못 죽였지만.'
도마 도읍지의 암살 시도는 불발로 끝났다. 이유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리베리우스의 무기가 암살에는 적합하지 못 했던 점, 그의 실력이 제노스를 완벽히 압도할 정도는 되지 못 했던 점, 그리고 뜻을 같이 했던 동료가 제노스를 상대하기에는 약했다는 점. 보호를 업으로 삼은 리베리우스는 동료한테 과도한 데미지가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데에 많은 신경을 쏟았다. 제노스는 그걸 알고 처음에는 동료를 먼저 제거하려고 하다가, 나중에는 싸움이 재미가 없다며 칼을 집어넣었다.
그 때 제노스가 뭐라고 말했었더라. 조금 더 실력을 갈고닦아서 본인의 피를 끓게 만들만한 사냥감이 되라고 했던가.
그러면 본인은 이 지루하고 하찮은 세상에서 자신을 사냥하는 낙으로 살아가겠다고 했던가.
"건방진 새끼!"
까앙! 리베리우스의 도끼가 제노스의 검 한 자루를 쳐냈다. 저것이 제노스한테 마지막으로 남은 한 자루였다.
제국이 점령한 알라미고의 왕궁. 총독이 점거한 왕좌. 그리고 그 앞에서 무기를 휘두르는 사람이 리베리우스다. 긴 시간동안 먼 길을 돌아 알라미고 탈환 작전은 최종 국면에 접어들었으며, 리베리우스가 맡은 역할은 제노스의 수급을 가져오는 것.
제노스가 비틀거리며 두세 발을 물러난다.
열다섯 적부터 이어져오던 숙명에 종지부를 찍을 때였다. 리베리우스는 지금 후련한가? 행복한가? 본인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저 눈 앞에 있는 상대한테 오롯이 집중할 따름이다.
언젠가 느꼈던 공포심은 휘발된지 오래였다. 전투에 휩쓸리고 또 빠지며 부채감은 눈녹듯이 사라졌으며, 그 자리를 차지한 건 자기 승화를 눈 앞에 둔 초극이었다. 이 곳 이 시간에 리베리우스가 살아있다. 그것이 유일하다.
허리를 숙여 숨을 고르던 제노스, 불현듯 크게 웃음을 터뜨린다.
리베리우스는 흠칫거리며 제노스의 동태를 살핀다.
"하하하! 좋아, 좋아. 제법 재미있는 짓을 하는구나! 사냥감이 이 정도는 돼야 사냥을 할 맛이 나지!"
"내가 너 재미있게 하려고 싸우는 줄 아냐? 이 새끼가 아직도 자기 분수를 모르네?"
"야만족의 마을에서 처음 다시 만났을 때에는 실망이 컸다, 한 때 나를 능가했던 실력자가 이렇게까지 이빨이 무뎌졌다는 사실에 한탄까지 나오더군. 그런데 싸움을 거듭하며 이렇게까지 발톱을 갈았을 줄이야...!"
"너 내 말 안 듣지 지금?"
제노스가 리베리우스의 말을 안 듣는 건 두 사람 모두한테 익숙한 일이다. 머리를 치켜든 제노스의 푸른 눈이 희열로 번들거린다.
"지금의 너라면 내 목덜미를 물어뜯을 수도 있겠구나. 나는 바로 그런 자와 목숨을 내놓고 싸워보고 싶었다!"
"............"
리베리우스는 그 말에 대고 차마 나도 그렇다고 시인할 수가 없었다. 제노스와 달리 그는 도덕이 무엇인지 알았으며, 야성보다 자애가 중요한 가치임을 머리로 알고 있었다. 제노스가 나불거리는 말은 그를 향한 리베리우스의 경멸심만을 촉발시켰다.
"너는 세상에 태어나서는 안 됐어."
"흥. 그걸 네놈이 말하는가."
제노스가 코웃음을 쳤다. 갑옷의 망토를 휘날리며 제노스가 뒤를 돌았다.
"따라와라, 우리의 싸움을 이 정도로 끝낼 수는 없지. 최고의 결전을 시작하자!"
리베리우스를 향해 미소를 짓는다.
... ...
리베리우스는 마치 홀린 듯이 제노스의 뒤를 따라간다. 에오르제아의 영웅으로서 갈레말 제국을 막아야 한다는 계산은 들어있지 않았다. 전투로 인해 지나치게 피가 쏠린 두뇌는 그 정도의 고차원적인 사고를 진행할 수 없었다.
리베리우스가 공중 정원으로 발을 들인 이유는, 그저, 제노스가 그를 불렀기 때문이었다.
"나의 공중정원에 온 것을 환영한다."
계절에는 조금 늦되다 싶은 꽃밭이 왕궁 옥상을 수놓는다. 바람 위에 꽃잎이 올라타 하늘을 꾸미고, 한가운데에 떠있는 것은 거대한 용을 봉인해둔 마도구. 고국을 잃은 알라미고인의 집념이 탄생시킨 야만신을 제국의 뜻이 제 입맛대로 휘두르는 모습을 올려다본다.
"이 짐승이 궁금한가? 아니, 짐승이 아니라 신이라고 해야 하나... 하하, 어쩌면 이것도 네가 날 위해 준비했다고 볼 수 있겠지. 복수에 눈먼 자를 몰아붙여 신을 부르게 한 데다, 그걸 막으려고 푼 병기가 신을 내 손에 넘겨줬으니까!"
리베리우스는 고개를 내려 제노스를 노려다본다.
"제노스... 넌 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아."
"이런...... 후후...... 말이 너무 많았나? 이해해다오. 살면서 이렇게 즐거웠던 적이 없거든! 네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면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귀기울여 듣고 싶은 마음까지 드는군."
거짓말하지 말라고 비꼬고 싶었다. 제노스가 리베리우스의 말을 귀담아 들은 적이 얼마나 된다고? 리베리우스가 원하는대로 움직여줬다면 그들의 관계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겠지. 그 부분에 관해선 리베리우스는 이미 포기한지 오래였다.
무어라 설득하는 말을 꺼내는 대신 리베리우스는 도끼를 꺼내들었다. 어차피 이제 저것을 풀어내 자신과 싸우게 시킬 셈이겠지.
"잔말 말고 덤비기나 해. 신룡이건 뭐건 다 토벌해줄 테니까."
"호오... 이걸 쓰러뜨리겠다고? 신을 사냥한 영웅이라 이건가......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반응이다."
제노스가 쫙 벌린 한 손을 치켜올린다.
"그런 태도로 일관하니 가진 능력을 제대로 쓰지도 못 했겠지...!"
그리고 그 손을 꽉 주먹쥔다. 도취된 사람 특유의 활기찬 목소리가 중갑이 덜걱대는 소리를 대신한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한심하기 짝이 없어! 싸움이란 즐기기 위한 것이다. 살기 위해, 배를 채우기 위해 이빨을 드러내는 것은 짐승의 본성이지만, '사냥'을 즐기고, 싸움에서 쾌락을 얻는 것은 인간만이 가진 특권이다!"
"......" "이 거칠고 무자비한 세상에 태어나서 단 하나뿐인 목숨을 불태우며 싸움을 즐기지 않으면 어떻게 살겠나!"
힘이 지나치게 많이 들어간 제노스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린다. 당장에 벌어질 싸움이 기대되고 또 설레어 몸을 주체할 수 없다. 열셋의 그 순간부터 지금 이 날이 찾아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던지!
"너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너는 나와 같은 부류니까."
모든 이해관계를 초월한 전투의 순간, 오로지 나 자신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끓어오르는 전신의 피. 그리고 그 전부를 겪고난 뒤에 찾아오는 기쁨이란! 제노스의 세상에서 그것을 아는 사람이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으며, 그것을 누릴 자격이 되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래, 눈 앞의 사내 이외에는.
"지금의 네놈이라면 평생의 벗으로서 곁에 두어도 좋을 것 같군."
어리석게도 선험적인 특권에서 눈을 돌리고 아무 의미도 없는 세속적 가치에만 관심을 두던 자였다. 제노스는 그것에 실망하여 한때 에르킨을 향한 관심을 완전히 버렸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다시 그 때와 같은 투기를 몸에 지닌 에르킨이라면.
다시 한 번 옛날처럼 평생을 함께 하며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 어떠냐? 나와 함께 살지 않겠느냐?"
......
에르킨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제노스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큭큭... 그렇겠지.... 역시 넌 나와 똑같아....... 지금 네 머릿속은 마지막 싸움에서 어떤 쾌락을 얻을 수 있을지로 가득 차 있어....... 지금도 빨리 싸우고 싶어서 온몸이 떨리겠지? 나 역시 그러하다!"
침묵을 해석하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자신과 똑같이 사고하는 벗이란 어떻게 이리도 아름다운지.
제노스는 자신의 뜻대로, 에르킨의 뜻대로 검끝을 에르킨한테 겨누었다.
"역시 너만이 내 유일한 벗이 될 수 있어! 알라미고의 패권 따위 어찌 되든 상관 없다. 그저 함께 즐겨보자!"
검을 위로 휘두른다. 신룡을 가둔 마도구가 두동강이 나 바닥으로 떨어진다. 고장난 마도구가 곳곳에서 작은 폭발을 일으키고, 그 사이로 신룡이 눈을 떠 거대한 날개를 펼친다. 제노스는 그 거대한 신의 핵에 자신의 모든 것을 융합시킨다......
그렇다, 제노스는 신을 굴복시켜 신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끝을 향한 싸움이 시작된다...!"
노을진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신룡. 그제야 리베리우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다. 신룡의 꼬리를 좇아 뛰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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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백5-1 | 홍련 | 잡담방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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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결전은 하늘에서 이루어졌다. 알라미고 궁정은 두 사람의 싸움을 담아내기에 지나치게 좁았다.
바람이 휘몰아친다. 작은 얼음 결정이 태양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빗방울처럼 추락하는 선혈이 신룡의 것인지 리베리우스의 것인지 분간하기 힘들다.
하나 확실한 것은, 그 싸움의 승자가 리베리우스라는 점이다.
리베리우스는 알라미고 왕궁에 오기 전부터 손으로 다 셀 수 없을 만큼의 신을 토벌한 전적이 있다. 제노스가 신과 융합한 그 순간부터 어쩌면 승패는 결정이 났던 걸지도 모른다.
리베리우스가 신룡의 핵에서 제노스를 떼어냈다. 그들은 두 개의 유성이 되어 지면으로 떨어진다. 그 모습을 보고 수도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최후의 결전이 막을 내렸음을 모두가 깨닫는다.
제노스가 공중 정원으로 추락하고, 리베리우스 또한 그 옆에 착지한다. 충격으로 비산한 꽃잎들 또한 그들과 같이 팔랑팔랑 내려온다. 한들한들, 유유히.
마지막까지 두 다리로 서 있는 사람은 리베리우스 한 명이다.
"......"
말없이 제노스를 내려다본다. 제노스는 미동조차 없는 것이 정신을 잃은 것 같다.
"리베리우스! 괜찮아?!"
추락으로부터 멀지 않은 시간 뒤에 리베리우스의 동료들이 공중 정원으로 달려왔다. 영웅이자 뜻을 같이 하는 동료를 치료하려는 심산일 것이다.
허나 그들이 말을 건 것이 문제였는지 제노스가 정신을 차리고야 만다. 재빠른 몸짓으로 칼을 주워들며 몸을 일으키는데 끊임없이 토혈을 하는 모습이었다. 리베리우스의 곁으로 모여든 동료들은 다시금 일어선 제노스를 보며 전투 태세를 갖춘다.
다만 리베리우스는 무기를 꺼내들지 않았다. 제노스가 숨을 고르는 모습을 내려다볼 뿐이다.
"설마 내가 사냥당할 줄이야............."
리베리우스가 방해하지 않은 덕에, 제노스는 자신의 심경을 가감없이 털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즐거웠다. 최고의 싸움이었어....... 이 정도로 시원한 기분은...... 처음 느껴본다......."
"시원하다고?! 이렇게 큰 희생을 치르게 해놓고?!"
알라미고인 동료가 제노스의 말에 격분해 소리를 지른다. 이해하지 못 할 반응은 아니다. 침략국의 지배 세력으로서 그가 방금 한 말은 용서받지 못 할 개소리에 불과하다. 자신이 아무 잘못도 없다는 저 태도 또한 규탄받아 마땅할 짓거리였고......
"... 이젠 아무래도 상관 없다....... 이렇게 대단한 싸움을 할 수 있었으니....... 하나뿐인 목숨을 걸 수 있었던...... 최고의 시간이었다......."
리베리우스도 제노스가 싫었다. 그가 하는 언행 하나하나가 끔찍이도 거슬려 참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게 만족스럽다는 듯 후련하게 웃는 저 표정까지도.
그래도, 지금 와서는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저도 그랬어요. 제노스."
하늘을 올려다보던 제노스가 고개를 내렸다. 시선의 한중간에는 리베리우스가 있다.
"당신과 싸울 수 있던 지금 이 순간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행복했어요."
"자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 그래서 저는... 당신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싶어요. 그러기 힘들 거라는 건 알지만요. 학살과 유린의 책임자로서 마땅히 벌을 받아야겠고, 피해자들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평생동안 죄를 씻어야 할 거예요..."
리베리우스의 손끝이 떨렸다. 과거의 자신을 마주하는 것만큼이나 지금의 나 자신을 인정하는 것 또한 만만찮은 공포를 수반하는 행위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용기를 내보기로 한다. 개인의 기쁨과 인류의 정의는 함께 갈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언젠가 그 모든 죄를 전부 속죄할 때가 오게 된다면...."
제노스가 리베리우스를 친구라고 불러주었으니까.
이번에는 리베리우스가 먼저 손을 내밀기로 했다.
"저와 같이 둘이서 이 세상을 둘러보지 않으실래요? 마음 내키는 대로 싸우고 먹고 자고 싸우기를 반복하는 여행, 분명 재밌을 거예요."
리베리우스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의 이상이 공존하는 길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본인한테 내밀어진 손을 제노스는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
선뜻 잡지도 아니하였고, 필요 없다며 내치지도 않았다. 그저... 바라보았다.
"...... 나의 벗이여. 너는 여전히... 아직... 그런 말을 하는구나."
그리고는 다시금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미 흘러가버린 어느 순간을 계속 좇는다.
"나의 심장이 오랫동안 고대해온 최고의 싸움을 맞이한 이 순간에... 그런 말을 하는군. 그래... 잘 알았다."
"......"
"나한테 미래 따위는 있을 수가 없어."
제노스가 칼을 경동맥에 가져다댄다.
"잘 있거라. 내 처음이자 마지막 벗이여."
제 때에 상황을 파악한 새벽의 혈맹 일원이 달려가봤지만 이미 늦었다. 날이 잘 벼려진 칼은 제노스의 목을 깔끔하게 베어냈다. 제노스는 순식간에 대량의 혈액을 잃었으며, 힘을 잃은 몸뚱아리가 꽃밭 위로 쓰러졌다.
쓰러진 시체 앞에 서 있던 리베리우스한테 핏방울 몇 방울이 튀었다. 핏자국이 남은 얼굴로 웃음을 지으니 허탈함이 여실히 드러났다.
"저 새끼한테 기대를 한 내가 잘못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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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백6 | 칠흑 | 잡담방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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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내용
초월하는 힘의 여파가 가신 뒤에는 편두통이 으레 뒤따른다. 이 능력에 익숙하지 않은 초창기에는 비틀거리거나 쓰러지기도 몇 번 했었지만, 어느 정도 모험가 경력이 쌓이고 이런저런 경험을 많이 한 뒤로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인내하는 것만으로 넘길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다만 아무리 경험을 많이 한다 해도 타인의 과거 기억을 마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지각한다는 건 유쾌하지 않다. 약간의 구토감이 올라오는 것을 리베리우스는 마른침을 넘겨가며 꾹 눌렀다.
눈꺼풀을 서너 번 깜박여 시야를 정돈하니 갈레말 제국의 황궁에서 혈맹의 아지트로 풍경이 바뀐다. 자신처럼 초월하는 힘으로 과거를 본 동료가 한 명, 어쩔 줄 몰라 발만 동동 구르는 동료가 한 명, 그리고 제국의 현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찾아온 옛 동료가 한 명. 습관적으로 일행의 안전을 확인한 리베리우스가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여기에는 청린수 특유의 코를 찌르는 불쾌한 냄새가 없다.
추레한 여행자복을 입은 창잡이 동료가 눈살을 약간 찌푸렸다. 제국에 잠입했다가 막 귀환했던 그 사람이었다.
"내 과거를 봤나?"
"네. 에스티니앙이 잠입했다가 제국군한테 들켜서 도망치는 모습을... 그런데 당신이 쓰던 그 기술 알라 몬 맞죠? 드래곤족이 쓰던 거. 그걸 왜 당신이 쓸 수 있어요? 그것도 그렇게 물먹듯이 자주?"
"참수를 그렇게 밥먹듯이 써대는 전사한테 듣고싶지는 않아."
"천체강하 기술도 그렇게 자주 쓸 수 있으시고... 제가 체험해보니까 당신 몸에 흐르는 에테르가 예사롭지 않더라고요. 나중에 한번 언제 한번 진짜 한번 제대로 해부하게 해주시면 안 돼요?"
"이봐. 금고지기. 얘는 알라미고도 구하고 도마도 구했다는 놈이 왜 바뀐 게 하나도 없어? 정신머리 정도는 뜯어고쳐졌어야 하는 거 아냐?"
혈맹의 금고지기가 리베리우스의 매력 포인트가 이런 점이라고 필사적으로 옹호하는 사이, 나머지 한 명의 동료가 리베리우스한테 걸어왔다. 초월하는 힘의 부작용인 두통이 아직 남아있는 모습이었다.
"리비의 초월하는 힘은 이런 쪽으로 발달됐구나... 나는 너처럼 간접 체험을 할 정도는 아니었거든."
"루루도 날 연구해보고 싶어졌어?"
힘없이 웃으며 대꾸한 말에 쿠루루 또한 씁쓸하게 웃어주었다.
"응. 언젠가는. ...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리비, 너도 나와 똑같은 걸 본 거지?"
"......"
리베리우스가 자신의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무언가 들키고 싶지 않은 게 있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할 것 같았는지 그의 고개가 서서히 아래로 고꾸라졌다.
그러니까, 지금 리베리우스의 상황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이세계에 소환되어 어둠의 대마법사를 무찌르고 인류를 구한 용사가 된 뒤 원래 세계로 돌아왔더니 자결했던 친구가 되살아나서 제국의 황제인 자기 아버지를 존속살인 했다는데요?
"괜찮아?"
쿠루루가 걱정스레 올려다보며 하는 말들이 리베리우스로 하여금 현실 감각을 붙잡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표정이 겨우 원 상태로 돌아왔다는 확신이 들자 그제서야 리베리우스는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렸다. 쿠루루의 눈썹이 팔자로 내려갔는데 리베리우스가 걱정되어 죽겠다는 마음을 초월하는 힘 없이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안 괜찮을 게 뭐가 있겠어."
"리비... 제노스가 죽은 뒤로 네가 힘들어한 걸 알아. 그의 시체를 이용하는 자가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랬고. 그의 부활이 삼대륙 정세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지금은 확실치 않아, 하지만 적어도 너한테는 많은 영향을 주었겠지."
"......"
"그것이 긍정적인 방향일지 부정적인 방향일지는 잘 모르겠어... 모르니까 네가 걱정돼. 리비, 괜찮아? 버틸 수 있겠어?"
아, 이건 안 되겠다. 리베리우스가 다시 제 얼굴 아래쪽을 가렸다. 쿠루루는 리베리우스보다 키가 한참 작기에 아래로 고개를 숙여봤자 얼굴이 더 잘 보일 뿐일 거라는 걸 알면서도 가슴 쪽으로 얼굴을 파묻는 걸 멈추지 힘들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창술사 동료가 대화에 끼어든다. 기가 찬다는 표정을 한 채다.
"버틸 수 있겠느냐고? 그것만큼 내 파트너한테 아무 쓸모 없는 질문도 없을 거다."
"무슨 말이야? 에스티니앙."
"딱 봐도 보이잖아, 얘는 지금..."
찰싹.
리베리우스의 꼬리가 에스티니앙의 허벅지를 세차게 때렸다.
"뭔데."
"말하지 마요. 실례예요."
"뭔데?"
"아무튼 루루. 걱정해줘서 정말 고마워, 하지만 나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그냥 쓰러뜨려야 할 적이 하나 더 늘어났을 뿐이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은 바뀌지 않았잖아. 그렇지?"
리베리우스가 웃는 모습은 여상했다.
"나는 괴롭지 않아."
아니다, 그걸 정말로 평소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풀린 동공에 상기된 피부로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을 억지로 대화 상대한테 맞추려고 하는 모습이?
단서가 눈에 들어오자 쿠루루의 초월하는 힘이 제 역할을 다 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가진 초월하는 힘은 마음의 벽을 뛰어넘어 상대방의 감정을 읽는 데에 특화되었다. 그런 쿠루루가 지금 읽어낸 리베리우스의 감정은... 희열이다.
"......"
쿠루루는 방금 전 보았던 과거를 떠올렸다. 바리스 황제한테 검을 찔러넣은 제노스와 상처를 틀어쥐며 아들을 올려다보던 바리스. 아들한테 제국이 짊어진 사명을 네놈 따위가 짊어질 수 있겠느냐며 외치는 황제한테 제노스가 뭐라고 말했던가.
'상관 없다. 나는 당신의 답답하고 지루한 사상 따위를 이을 생각이 없다. 갈레말 제국을 장악할 생각도 없어. 다만...... 방해꾼을 제거하러 왔을 뿐이다.'
그는 자신 몫의 말을 읊으며 허공 한 점을 올려다보았다. 그리운 과거를 좇는 듯하면서도 희망찬 미래를 꿈꾸기도 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의 벗이 말하더군. 자신 또한 나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하지만 그러기에는 나의 벗을 붙잡는 장애물들이 너무 많아. 속죄니 처벌이니 한심하기 짝이 없어...... 그런 것들을 스스로 버리지 못 하겠다면 내가 직접 없애는 수밖에.'
제노스가 자신의 아버지를 향해 칼을 치켜들었다.
'지루한 전쟁, 보잘것없는 병기, 겨우 그런 것들에 내 사냥감을 빼앗길 수는 없지.'
'넌...... 설마...... 고작 그런 이유로............?'
'그 밖에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내 사냥을 방해할 셈이라면 여기서 죽어라.'
그것을 끝으로 갈레말 제국의 황제는 절명했다. 쿠루루는 그 장면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리비도 제노스처럼............"
차마 뒷말을 잇지는 못 했다. 리베리우스가 오라줄을 기다리는 죄인이라도 된 마냥 공손한 자세로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할 말을 찾지 못 한 쿠루루가 아연해하고 상황을 파악 못 한 금고지기가 주위를 두리번거릴 무렵, 에스티니앙이 이 대화를 끝낼 말을 하나 뱉었다.
"미쳤지."
리베리우스의 꼬리가 에스티니앙을 다시 한 번 더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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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백7-1 | 효월 | 잡담방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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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내용
대지가 무너지고, 피의 강이 흐르며, 문명은 불타오른다⋯⋯.
제노스는 멸망해가는 한 때의 번영 사이를 걸어나간다. 비탄의 절규는 그한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 한다. 필요하다면 제노스 스스로 저것을 불러일으킬 수도, 어쩌면 심혈을 기울여 종식시킬 수야 있겠으나, 그 또한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임이 자명하다. 뜻대로 되지 않는 운명에 절망하고 보답받지 못 하는 삶에 낙망하는 인간들한테 제노스는 의미를 두지 않았다.
이 도시에 영웅은 찾아오지 않았다.
제노스는 영웅이 되고픈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이 광경을 본다면 가장 먼저 달려나갈 사람이 있음을 알고 있다.
"⋯⋯ 에르킨 다무 파호드."
과거에서 온 집념이 만들어낸 백일몽 속에서 제노스는 단 하나의 이상을 입에 담는다. 제노스가 오로지 바라는 미래이며, 현재를 살도록 하는 원동력이자, 끝에서 마주할 단 하나뿐인 존재. 제노스는 늘상 그리는 벗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불타는 도시가 피부에 전하는 열기는 불쾌할 뿐이며 코끝을 스치는 잿가루는 그저 귀찮을 뿐이다. 겨우 이런 것에 너는 왜 그리도 관심을 쏟는가. 겨우 이런 것에 눈이 먼 채로⋯⋯
"너 또한⋯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는 자임에도."
윤리니 국가니 그런 것들 없이도 순수하게 자신과 마주하여 지고의 쾌락을 향유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벗은 어려운 길을 돌아가기로 했다. 나약한 인간들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세워둔 울타리 속에 몸을 욱여넣고 그것이 행복이라 본인을 속이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그것을 부수어주마."
에르킨이 자신을 가두는 울타리를 부순다면 그는 그 좁은 자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 찰나에는 격노와 울분이 제노스를 향하겠지. 그 순간에는 제노스만을 바라봐주겠지. 머나먼 옛날처럼 오로지 둘이서만 칼을 맞댈 수 있겠지⋯⋯.
제노스가 낫을 횡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불길의 환상은 걷혀 빛 한 점 없는 어둠이 돌아왔다. 그 어둠 속으로 제노스는 걸어간다.
제노스는 영웅이 될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영웅'을 마주할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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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은 자멸했다. 그것을 진정으로 자멸했다고 봐야 하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형태만 따지자면 제국은 스스로 무너진 셈이다.
제국의 적장자인 제노스 예 갈부스는 황제를 시해하고 황궁을 장악, 모든 국가 시스템을 마비시키고 거의 대부분의 백성들을 이지 없는 산송장으로 만들었다. 만년설이 쌓이는 한랭지에 위치한 제국 수도에 얼어죽거나 굶어죽은 시체가 점점 쌓여만 갔다. 그나마 그들은 편안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제국의 믿음직한 기계병이나 세뇌당한 자신의 가족에게 살해당한 사람들도 수두룩하다.
제국은 복수당할 기회를 주지 않고 하루아침에 멸망했다.
그것을 애석하게 여기는 자들이 있었으니 그 중 하나가 리베리우스였다.
"⋯⋯ 아무리 그래도 그걸 갈레말인 앞에서 대놓고 말하진 않을 거지만요⋯."
"잘 생각했어."
리베리우스의 푸념을 팔짱을 낀 채 듣고 있던 산크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오르제아의 갈레말 제국인 기피 현상은 근 수십 년 새에 이미 뿌리깊게 박힌 참이다. 지배층이 정치적 스탠스를 하루아침에 바꾼다 하여 일반 백성들이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태도를 바꿀 수 있을 리가. 크고 작은 잡음은 여지없이 생기기 마련이다.
하물며 우리의 영웅은 어떠한가? 제국의 피지배 지역 출신이며 몇 년 간 피랍 생활까지 하다가 가까스로 탈출한 과거가 있는 입장이다. 갈레말한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가 없다. '그래⋯ 전두엽 빠개진 윗대가리들이 문제지 뒤통수 맞은 백성들한테는 기회를 줘야겠지⋯⋯.' 라고 생각을 하다가도 '⋯⋯ 아니 근데 저새끼들이 먼저 개빻은 사상을 주장했다고!' 하면서 울컥울컥 화가 치솟는다.
그리고 현재, 피구조민 하나의 정수리에 도끼날을 찍어버리고 싶은 걸 도저히 못 참겠다며 산크레드한테 비척비척 다가와서 퀭한 얼굴로 어깨를 붙잡고 울분을 웅얼웅얼 토해내는 걸 막 끝낸 참이다. 인적 하나 없는 자리로 끌고 와 어떻게든 의자에 앉힌 다음에 마시멜로우를 잔뜩 넣은 진한 핫초코를 타주자 얼굴이 조금 나아졌지만⋯ 표정만 평소의 옅은 미소로 돌아왔다 뿐이지 신랄한 말솜씨는 여전하다. (사실 이게 오히려 평소같은 말솜씨다.)
"그치만 역시 우리쪽의 갈레말인분들 앞에서만 말조심을 하고 개X같은 말을 하는 갈레말인들만 있을 때는 쌍욕을 해도 되지 않을까 싶기는 해요⋯⋯."
"관둬, 네 입만 아프지. 수십년 동안 사상 세뇌를 당한 녀석들이야. 몇 마디 한다고 곧장 알아듣겠어?"
"제일 빠른 방법은 도끼를 사용한 방법이지요⋯⋯?"
"무력 정복을 할 게 아니면 그것도 그만 두자⋯."
리베리우스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 너희는 너무 착해요. 사람다운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을 그럼에도 인간이 맞다고 인정하는 것부터가 저한테는 너무 어려운걸요. 그리고⋯⋯."
"그리고?"
"⋯⋯ 구해줄 필요가 없는 죄인을 살리지 못 했음에 우리 쌍둥이들이 괴로워하는 걸 더는 보기 싫어요⋯⋯."
산크레드 또한 그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잘못된 일을 하는 사람한테 분노를 느끼는 건 인간으로서 당연한 도리라고 여겼다. 지금은, 그래, 새벽의 혈맹이 하는 일이 늘 그랬듯 완벽을 추구하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을 뿐이었다. 산크레드는 리베리우스의 어깨를 억세게 다독여주었다. 자신도 리베리우스와 똑같이 생각하고 있음을 알려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저 중에서 전범이 있다면 그들도 처벌을 받을 거야. 그렇게 되어야 옳고. 하지만 그건 우리 새벽의 혈맹이 아니라 동맹국 연합 측에서 판단해야 할 일이잖아?"
"⋯⋯ 그렇죠. 사법 제재는 안 되니까."
"지금은 그저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는 데에 집중하자. 그 중에는 알피노와 알리제도, 그리고 너도 '구하길 잘 했다'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
리베리우스는 금방 답하지 못 하고 킬킬거리는 웃음 소리만 냈다. 산크레드의 다독임은 마음이 따스해졌지만 그 뿐이었다.
"쉽게 동의하지는 못 하겠는걸요, 그 말."
"⋯⋯끙. 대충 넘어가, 나도 남을 위로하는 건 익숙하지 않다고⋯."
"어라, 그 말도 동의하긴 어렵네요. 위장술과 잠입술로 먹고사시는 분이 화술에 능하지 않다고 말하면 어떡해요?"
"어쭈. 이제 좀 견딜만 해졌나보네? 살맛 나니까 나를 놀리려 드는 거야? 영웅 나으리?"
"아아악."
산크레드가 리베리우스의 머리를 꾹 눌렀다. 리베리우스의 허리는 접히다 못 해 무릎과 코가 맞닿을 지경이 되었다. 리베리우스가 아픈 척을 하는 동안 산크레드가 뿔 가까이에서 조용히 말했다.
"정 못 하겠으면 구호 작전에서는 빼달라고 할까? '종말의 탑' 진입을 대비하기 위해 휴식한다고 하면 말릴 사람은 없을 거야."
"⋯⋯."
아무한테도 표정을 보이지 않은 채 고민했다.
"⋯⋯ 알리제와 알피노는 구조에 계속 참여할 거예요. 제가 그 아이들을 지켜야⋯⋯."
말을 끝맺으려는 순간이었다. 불길한 에테르로 가득찬 폭풍이 전초지를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본능적으로 리베리우스가 꼬리 돌기를 바짝 세우고, 곧이어 '종말의 탑'이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뿜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서둘러 본대 쪽으로 달려나갔다. 구조되었던 갈레말인들이 하나같이 머리를 부여잡고 고통을 호소했으며, 몇몇은 짐승처럼 일어나 마물처럼 옆사람에게 달려들었다. 세뇌당한 사람들이 보이는 행동과 똑같았다.
전초지이자 피난소에 세뇌당한 '적군'이 생기고 있다.
"리베리우스!"
"알고 있습니다!"
산크레드와 리베리우스는 곧바로 인명 구조를 위해 흩어졌다. 세뇌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제 몫의 도구를 피구조민에게 나누어주고, 날뛰는 인원을 제압해 밧줄로 구속시켰다. 한 명이 제압됐다 싶으면 두세 명의 피세뇌자가 새로 나타난다. 미봉책만으로는 끝이 없을 것 같다, 리베리우스가 속으로 혀를 찼다. 이럴 때일수록 영웅을 부르는 목소리가 커지는 법이다.
"잠깐만요, 영웅님!"
도움이 필요한가 싶어 리베리우스가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곧장 달려갔다.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할 틈은 없다, 위기 상황에 상황 판단은 대처를 늦출 뿐이다.
그런데⋯ 잠깐만, 리베리우스가 눈을 찌푸렸다. 저 얼굴은 왠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 이라는 건 농담이고요!"
리베리우스의 몸이 검은 에테르로 둘러싸였다. 그제야 리베리우스는 연합군복을 입은 저 사람이 누구인지 떠올려냈다. 지극히 평범한 생김새라서 눈치채지 못 했다!
"아씨엔⋯⋯!"
"당신은 이쪽으로 오시지요. 전하께서 기다리십니다."
아씨엔 파다니엘. 세계의 종말을 일으키기 위해 제노스와 손을 잡은 자.
지금의 소동은 리베리우스를 납치하기 위해 벌인 소동이렷다. 그것을 깨달은 리베리우스는 뒤늦게 그한테서 거리를 벌리려고 했지만 아씨엔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두 사람은 텔레포 마법에 올라타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리베리우스가 사라진 빈자리는 소란스러운 적막이 메운다. 영웅의 실종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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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니쉬. 식전빵. 샐러드와 스테이크.
포도주를 넣고 끓인 수프 냄새를 맡으며 잠에서 깨어난다. 온몸을 지배하는 불쾌한 감각을 뒤로 하며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예스러운 식탁 전체가 시야에 들어왔고, 고개를 들었을 땐 식탁 너머에서 제노스가 스테이크를 써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얄미운 상판데기에 관한 감상을 제대로 갖기도 전, 오른쪽 귓가에서 밉상궂은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자, 식기 전에 드시길."
집사복을 입은 아씨엔 파다니엘이 부러 과장한 몸짓으로 요리 접시를 가리켰다. 제노스는 그의 시중을 받는 게 퍽 익숙한지 별다른 대꾸도 하지 않았다. 리베리우스는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이질적이고 또 불쾌하기 짝이 없는 상황인데도 말이다.
힘들게 눈알만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으려니 파다니엘이 깜빡했다는 듯 깜짝 놀라는 체를 하며 말했다.
"아, 투구를 벗을 때는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아직 '그 몸'이 낯설 테니까요."
꼬리가 없다. 꼬리 없이 균형을 잡는 감각이 괴상하기 짝이 없다. 머리 양쪽에 달린 납작한 살덩어리는 뿔만한 무게감이 없어 어색하고 또 징그러웠다. 옷감 안쪽으로 느껴지는 자신의 피부는 비늘이 하나도 없어 방패 없이 전장터에 나간 기사마냥 수치스러웠으며, 신장은 또 이상하게 작은 덕에 제노스의 눈을 노려보려면 기억보다 더 고개를 치켜들어야 했다.
리베리우스는 생각했다. 이놈의 황궁은 납치될 때마다 개같은 기억만 한가득 안겨주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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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백7-2 | 효월 | 잡담방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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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내용
리베리우스는 망했다고 생각했다⋯ 라는 서술도 많이 너그럽게 서술한 것에 가깝다. 눈 깜짝할 새 적진 한가운데에 납치된 것도 모자라 신체까지 탈취당했다. 이성을 제대로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과연 이런 상황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고기나 씹고 있을 수 있을까?
"어떠십니까, 혼이 다른 몸으로 옮겨진 기분은?"
그런 리베리우스의 상황을 꿈에도 모르겠다는 듯 집사복을 입은 어둠의 사도는 그의 옆에서 깐죽거리고 있었다. 예의바른 체를 하지만 저것 또한 일종의 놀이에 불과하다. 리베리우스는 파다니엘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짓씹듯 말했다.
"무슨 속셈이죠?"
"저런, 깊게 생각하지 말고 저녁이나 즐기시지요." 리베리우스가 보기 딱하다는 양 파다니엘이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전하의 벗이잖습니까? 그렇다면 기왕에 근처까지 온 김에 벗으로서 식사라도 대접하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드렸단 말입니다."
투구 아래로 눈알만 굴려 제노스를 노려본다. 그는 식탁 너머의 상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품 있게 식기를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그랬더니⋯⋯ 글쎄, 대답이 없으시지 뭡니까?"
"⋯⋯."
"그래서 긍정으로 해석했죠!"
마술사가 비둘기를 꺼내듯 양 팔을 활짝 펼치며 젠체하는 파다니엘. 리베리우스는 그를 향한 관심을 완전히 꺼뜨렸다. 이 상황의 원흉은 귀찮은 날파리가 아닌 눈 앞의 제노스일 터였다.
"⋯⋯ 뭔 생각이야. 네녀석이 설마 진짜 밥이나 먹자고 나를 끌고 오지는 않았을 거고."
"⋯⋯."
"어쩌자는 거냐?"
제노스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 기껏 차려놓았건만 먹을 생각을 안 하는군. 메뉴가 마음에 안 드나?"
자신을 살피는 제노스의 무심한 눈빛이 다감한 인간을 모방하는 것 같아 리베리우스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정확히는 리베리우스의 몸이 아니라 이름 모를 누군가의 몸이지만.)
"너는⋯⋯ 너라면 이런 상황에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가겠냐?"
"그런가⋯. 나도 그렇다. 내 벗을 앞에 두고는 무엇을 먹어도 허기질 뿐이다."
"씨발 말이 안 통해!"
리베리우스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다. 그가 자살한 뒤로 처음 만나는 자리건만 제노스는 하나도 바뀐 게 없다. 여전히 리베리우스의 말은 귓등으로도 들은 척을 안 한다는 뜻이다.
제노스는 리베리우스의 짜증이 아무렇지도 않다.
"이건 그저 흥을 돋우기 위한 전채다. 알라미고가 그랬고, 라자한이 그랬으며, 갈레말 제국이 그랬듯⋯⋯ 너라고 하는 영웅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해⋯⋯."
그 말을 듣자 온몸의 피가 식는 듯한 기분이다. 무릎 위에 올려둔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이름 모를 사람의 신체는 장갑이 끼고 있어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지 않았다.
"그 많은 사람들의 죽음이 한낱 도구에 불과했다고 말할 셈이냐."
"진실이 그러하지⋯. 영웅⋯⋯ 그것은 절망과 비탄이 소용돌이치는 곳에 나타나 목숨을 걸고 싸우는 자."
제노스의 뒤에서 무언가가 그르렁거렸다.
"그래서 이것저것 파괴해봤는데⋯⋯ 어땠느냐?"
리베리우스의 시선이 제노스의 뒤로 옮겨갔다. 인간 중에서도 유달리 거대한 제노스보다도 갑절은 더 거대한 무언가가 그 곳에 있었다. 그것은 말라비틀어진 인간처럼 보이기도 했고, 사슬에 묶인 괴물처럼 보이기도 했으며, 절망을 뭉쳐 반죽한 끔찍한 신처럼 보이기도 했다.
파다니엘이 리베리우스의 뒤에서 의자 등받이를 두 손으로 짚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친구분의 아버님이 신경쓰이시는 거군요? 아버님께선 무뚝뚝한 아드님이 친구를 데려와 감개무량한 모양인데⋯⋯ 친구끼리 있는 자리에 부모님이 끼어들면 불편하기 마련이죠, 그럼요."
"⋯⋯ 아버님, 이라고요."
"갈레말 제국은 신앙을 일절 금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을 소환할 만한 강대한 존재를 떠올리지 못 할 거라는 인식이 있죠.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있잖습니까? 그들이 두려워하고, 숭상하고, 매달리는 존재⋯⋯ 그래요, 자신의 국가, 그 상징인 '황제' 말입니다."
구두소리를 내며 파다니엘이 '황제' 쪽으로 걸어간다. 장대한 연설을 하는 듯한 그의 팔은 연극을 하듯 넓게 펼쳐졌다.
"최근 들어 제국은 온갖 악재를 겪었습니다. 그럴수록 백성들은 바라기 마련이죠, 흔들리지 않는 강한 황제가 군림해주기를. 그 간절한 바람을 바리스 전하의 몸에 내려드린 겁니다!"
희열을 견디지 못 하겠다는 양 목소리가 커지고 또 높아진다.
"그렇게 나타난 존재는 그야말로 갈레말의 혼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
"실로 그렇지 않습니까, 전하?"
제 차례를 마친 파다니엘은 제노스를 향해 허리를 숙인다. 제노스는 그것이 전부 사실이라고 침묵으로 답했다. 한때 아버지였던 괴물의 울음소리를 배경음 삼아 제노스는 와인잔에 손을 가져다댔다.
"마음이 동할 정도가 되었느냐?"
마음이 동했느냐고. 충분하다 못 해 넘칠 정도로 동요했다. 가히 인간을 벗어났다고 칭할 법한 만행에 리베리우스는 빈 속을 게워낼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입가를 손으로 가렸으나 손가락 끝에 닿는 건 전면 투구의 차가운 표면이었다. 제노스는 와인을 목구멍으로 넘기며 그 모습을 구경했다.
리베리우스는 사베네어 섬의 토착민들이 저 울음소리에 하나둘 생기를 빼앗기던 장면을 떠올렸다. 리베리우스는 갈레말 제국 수도의 시민들이 시체가 되어 바닥에 쌓여있던 장면을 떠올렸다. 리베리우스는 이 곳에 오기 위해 자신의 동료들이 치러야 했던 희생을 떠올렸다.
제노스는 지금 이 모든 게 리베리우스를 위해 저지른 짓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윽⋯⋯."
눈 앞이 흐려지려던 차, 식기가 흐트러지고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어느샌가 제노스는 리베리우스의 앞에 와 그의 얼굴 아래를 커다란 손으로 덮어 잡아챘다. 덮개가 열린 하관에 제노스의 손바닥이 그대로 닿았고, 고개는 강제로 뒤로 젖혀져 복잡한 무늬의 천장 양식을 마주해야만 했다.
"우으, 읍⋯⋯!!"
"나의 벗은 비위가 참 약해⋯."
제노스의 팔을 떨어뜨리기 위해 그의 손목을 두 손으로 긁었다. 하지만 제노스의 굵은 팔뚝은 꼼짝조차 하지 않았다. 손톱조차 드러나지 않은 뭉툭한 손끝이 얄궂다.
"그것이 원망스럽기도 하나 지금은 순수하게 감사하군. 지금 느끼는 감정에 솔직해져. 나를 향해 분노하고, 경멸하고, 투지를 불태우는 거다⋯⋯!"
"읍⋯! 큭!"
"⋯⋯ 하지만 아직은 부족해. 모든 분노를 쏟아낸다 해도 내가 바라는 수준까지는 도달하지 못 할 터. 그러니 내가 준비한 모든 장작을 불태울 때까지 기다려라⋯⋯. 너도 분명히 좋아할 거다."
"으윽!"
"⋯⋯ 이 쯤이면 진정됐겠지."
토기가 가라앉은 것 같자 제노스가 손을 내렸다. 답답했던 숨을 고르기도 전, 곧바로 리베리우스는 제노스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뺨을 타고 묽은 액체가 흐른다.
"손 놓고 꺼져!"
"⋯⋯."
묻은 침을 느릿하게 닦아내는 제노스는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내가 준비한 시간이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지? 벗다운 대접을 한번쯤은 해볼까 싶어 잠자코 있었건만⋯⋯. 역시 너와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던 모양이구나. 지루한 만찬에 초대한 것을 사과하마."
제노스가 손을 놓자 연약한 휴런의 몸은 그대로 의자에 나동그라지듯 떨어졌다. 예상은 하고 있었다만 지금의 신체는 원래의 몸과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약하다. 당장에라도 자신의 최대 무기를 되찾아야 한다는 초조함에 시야가 점점 좁아진다.
제노스는 등을 돌려 만찬장의 한쪽으로 걸어갔다. 파다니엘이 의아하다는 듯 뒷모습에 말을 건다.
"이런, 식사는 벌써 끝입니까?"
"⋯⋯."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다. 제노스가 내딛는 발걸음마다 촛불이 하나씩 켜진다.
"벗이여⋯⋯. 나는 예전에 아씨엔에게서 이 몸을 돌려받기 전까지 다른 사람의 육체를 사용했다. 제법 배울 점이 많더군. 다른 체구로 싸워보니 나의 안 좋은 버릇이 보였어."
그러더니 불현듯 걸음을 멈춰선다. 거대한 풍채의 그의 뒤에 무엇이 있는지, 리베리우스가 앉은 자리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과연 강함은 혼에 깃드는 것인가, 육체에 깃드는 것인가⋯⋯. 그것을 자문할 기회를 네게도 주마."
"⋯⋯."
선득한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이 생각을 진작부터 했어야 한다.
나의 원래 몸은 지금 어디에 있지?
나의 원래 몸을 가지고 무얼 하려는 거지?
"⋯⋯ 제노스!!"
불길함은 리베리우스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무력의 차이 따위 신경쓸 때가 아니다, 어떻게 해서든 제노스를 멈춰야 한다. 평소보다 지독하게도 느리게 느껴지는 뜀박질의 목표 지점에는 섬뜩하게 웃는 제노스가 있었다.
"자아⋯ 되찾으러 오너라."
그 말을 끝으로 제노스가 앞으로 쓰러졌다. 실이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힘없이 추락한 몸의 뒤로 숨겨져 있던 인간의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뿔, 얇은 꼬리, 단단한 근육과 새하얀 머리카락. 의자에 앉아 허리를 푹 숙이고 있는 저 사람은 틀림없는 리베리우스다. 정신을 잃고 기절해있던 그 신체가 고개를 든다. 리베리우스의 영혼이 그곳에 없음에도 몸뚱아리가 입꼬리를 들어올린다. 처진 눈두덩이 아래의 푸른 눈동자는 평소와 똑같았으나 리베리우스는 알 수 있었다, 저건 제노스다. 저런 눈을 할 수 있는 건 제노스밖에 없다.
다급하게 팔을 뻗으며 외쳤다.
"멈춰!!"
그러나 제노스는 리베리우스의 외침을 듣지 않았다. 눈을 한 번 깜빡일 찰나의 순간, 리베리우스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제노스는 황궁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순간이동 마법이었다.
"헉! 큰일났네요!!"
텅 빈 의자를 보며 황망해하고 있을 새가 없었다. 리베리우스의 바로 옆에서 파다니엘이 허둥대는 척을 하며 새된 목소리를 낸다.
"저 몸으로 당신인 척하고 전초지로 돌아가면 어떤 대참사가 일어날지?!"
"이 새끼들이⋯ 이럴 목적으로⋯⋯!!"
이를 박박갈며 외치는 게 파다니엘의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두 손 두 발 다 들 정도로 놀란 체를 한 게 언제냐는 듯 히죽 웃으며 허리를 숙이는 게 아닌가.
"그럼요, 그럼요! 피바다가 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어서 쫓아가셔야 할 겁니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비켜!"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배웅해드리죠."
만찬장을 뛰쳐나가던 리베리우스는 어느샌가 실외로 이동되어 있었다. 갑자기 밝아진 빛에 적응하기 위해 동공이 급하게 수축한다.
눈보라가 치는 밤, 폐허가 된 수도 한복판, 무장한 병사가 돌아다님과 동시에 살육 병기가 하늘을 메운 내전지. 우뚝 걸음을 멈춰섰다. 공기에 가득한 청린수와 재 냄새가 지금처럼 무섭게 다가온 적이 없었다.
지금의 신체로 이 곳을 평소처럼 돌아다닌다면 순식간에 죽어버릴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걸어서 가주세요. 안 그러면 전하의 뜻을 거스르게 되니까요?"
"⋯⋯ 눈물나게 고마운 배려 감사하군요."
"천만의 말씀을요. 이제부터 전하를 막으시러 가실 텐데 이 정도는 해드려야지 않겠습니까. 얼른 쫓아가서 막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하실지⋯⋯ 어휴, 무서워라."
파다니엘을 죽일듯이 노려본다. 아씨엔이란 이름이 붙은 놈들은 하나같이 짜증나는 놈들밖에 없다.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파다니엘은 그저 웃을 뿐이다.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부디 힘껏 애써주시길."
말 안 해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리베리우스가 익숙하지 않은 검을 빼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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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몸의 원 주인은 머저리가 분명하다. 자신의 손에 맞지 않는 크기의 검을 주 무기로 쓰면 어쩌자는 건가. 자꾸 흘러내리는 통에 검을 놓칠 뻔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허억⋯. 아윽⋯⋯."
골목길 벽에 몸을 숨기며 옆구리를 움켜쥐었다. 방금 전 병사한테 걷어차였을 때 내상이 생긴 것 같다. 겨우 발길질 한 방에 속이 상한다는 게 정말 믿기지가 않았지만 현실이 그랬다.
이렇게나 약한 몸으로 잘도 살아왔구나. 이제는 분노를 넘어 안타까움까지 느껴질 지경이다.
지금 제일 걱정해야 할 건 본인의 안위였지만 말이다.
"이⋯⋯ 약해빠진⋯⋯ 몸뚱아리⋯⋯!!"
어금니를 꽉 물며 팔뚝에 자동주사기를 찔러넣었다. 전신 근육을 지배한 어마어마한 피로감과 고통이 조금은 가시는 느낌이 들었다.
방금 그가 자신한테 주사한 것은 길가에 널린 시체에서 주운 군용 약물이었다. 몇 번 시험해본 결과 이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탈출은 커녕 생존조차 힘들다고 판단했다. 겨우 말단 병사 하나 해치운 걸로 숨이 넘어갈 듯 껄떡댄다는 게 말이나 되나? 칼에 스친 고통이 이렇게나 괴로운지 오늘 처음 알았다. 자동화 병기들과 싸우는 건 꿈도 못 꾼다.
리베리우스는 원래의 신체가 절실했다. 본 실력대로라면 이런 격전지따위 순식간에 정리하고 동료들한테 돌아갈 수 있었을 텐데.
동료들의 곁으로 갈 수 있었을 텐데⋯⋯.
"⋯⋯."
후들거리는 무릎을 부여잡고 겨우 일어났다. 한시라도 빨리 동료들한테 가야 한다.
이런 난장판을 순식간에 정리할 수 있을 능력을 가진 몸뚱아리로 제노스가 무슨 짓을 할지가 뻔하니까!
"죽여버릴 거야⋯⋯!!"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살인 계획을 되새겼다. 비틀거리며 골목 밖으로 나가자 다 무너진 도심 사이로 이성을 잃은 병사들이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리베리우스는 그들의 시야에 들지 않도록 조심하며 지형지물 사이를 옮겨다녔다. 사방을 주의깊게 살피며 이동하려니 한 블록을 건너는 시간이 몇 년같이 느껴졌다. 다음 길목에는 병사들이 적기를 진심으로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두 명의 병사를 따돌렸을 무렵, 지근거리에서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봐, 군인 양반!"
척추반사적으로 몸을 숨기려고 했다. 그런데 목소리의 주인을 살펴보니 그는 리베리우스를 해치려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마물의 공격을 막아내며 힘겹게 창을 찔러넣던 중 리베리우스를 발견한 듯 싶었다. 지쳐서 허덕이면서 시민이 다시 외쳤다.
"제정신이면 좀 도와줘⋯⋯!"
"⋯⋯."
어떻게 해야 하지? 리베리우스의 두뇌가 바쁘게 돌아갔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생존자 무리에 합류한다면 혼자 다닐 때보다 조금 더 안전하게 움직일 수 있을 거였다. 어쩌면 그들한테 베이스 캠프로 가는 길을 물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칼을 빼든 채 마물한테 칼을 휘둘렀다. 약점이 훤히 보이는데도 몸이 따르지 않아 급소를 찌를 수 없다는 건 정말 답답한 경험이었다. 두세 명의 시민이 이미 힘을 많이 빼놓은 덕에 마물을 처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문제가 있다면, 방비가 뚫린 도시를 습격한 마물이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크윽⋯⋯!"
한 마리를 해치우면 한 마리가 더 달려들었고, 그 마물을 죽이면 두 마리가 더 기어나왔다. 방패로 녀석들의 움직임을 막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마물들의 주위를 병사들 쪽으로 돌림으로써 습격을 해결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리베리우스가 자신을 불렀던 시민을 향해 외쳤다.
"생존자는, 윽,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입니까?"
"적어도 같이 다니던 사람들은 우리가 전부야. 더 합류할 사람은 없어!"
"그러면 후퇴합시다. 여기서 마물을 상대해봐야 힘만 빠집니다. 체력을 온존해야 합니다."
리베리우스가 걸치고 있는 군복이 시민들한테 신뢰감을 준 걸까, 생존자 무리는 별 반응 없이 그의 지휘에 따랐다. 어쩌면 그들의 머리로 전략을 생각하기에는 지나치게 지쳤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저 안전한 피난처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관심사가 없었으며, 그건 리베리우스도 마찬가지였다.
무리의 선봉에 있던 마물들이 정리가 되자 그들은 서둘러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다 같이⋯! 살아서 피난소로 돌아가자!"
"⋯⋯."
시민 중 한 명의 말에 리베리우스는 대답하지 못 했다. 심경이 복잡했다.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기도 전 비일상적인 소음이 난데없이 커지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생존자가 소리쳤다.
"노, 놈들이 온다!"
"무기 들어!"
달려드는 병사를 방패로 막아내며 혀를 찼다. 상황이 안 좋다. 소대 한 개 정도의 수가 몰려들고 있었다. 시민들의 전투 실력은 처참할 정도이며 자신도 별반 다르지 않은 상태.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기 위해 리베리우스의 뇌가 가열차게 굴러갔다.
"일반병은 각자 한 명씩, 강화병은 두 명 이상이 맡습니다! 공격 범위가 겹치지 않도록 산개합니다!"
"산개! 산개?!"
"각자 떨어지라고!"
"강화병 담당은 한 명은 방어, 한 명은 공격에─"
쾅, 지근거리에서 포탄이 터졌다. 폭발에 휘말린 부분은 없었으나 강력한 충격파에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 했다. 비틀거리며 흔들리는 시야를 어떻게든 다잡았다, 그러자 강화병의 몸이 새빨갛게 부풀어 오르는 게 보였다. 자폭의 신호다.
"─젠장, 전원 마도 아머 후방으로 숨습니다!"
멀쩡한 사람들은 안전 지대로 달렸다. 그렇지 못 한 사람은 절망적인 표정을 짓거나 이미 쓰러져 명을 달리 했다. 그 짧은 대치에도 사람은 이렇게나 쉽게 죽는다. 그것을 슬퍼하는 것조차 누군가한테는 사치가 될 수 있었다.
"우리가 왜 이런 꼴을──"
"군인 나으리, 우리 살 수 있겠지요─"
"집에 가고 싶──"
강화병의 신체가 터지고 일전의 포탄과는 비교하기 민망한 화염이 일대를 휩쓸었다. 사람들의 한탄은 이렇게나 쉽게 묻히고 사라졌다. 안전지대에 있던 사람들은 이번 폭발에서 몸을 지킬 수 있었으나, 리베리우스는 발견하고야 말았다. 근처의 청린수 연료통들이 강한 열기에 자극되어 푸른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다들 연료통에서──!!"
리베리우스의 외침은 늦었다. 두 번째, 세 번째, 그 뒤로 이어지는 폭발을 그 누구도 피하지 못 했다. 푸른 화염이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비명을 지르는 사람도 있었을까? 리베리우스는 알 수 없었다. 인간의 목소리 따위는 불꽃이 내지르는 울음소리 앞에서 제 힘을 떨치지 못 했다.
폭발에 휘말려 한참을 밀려나던 몸뚱아리가 겨우 멈췄다. 리베리우스는 그을음 깔린 돌바닥 위를 낙엽처럼 굴러다녔다. 사지를 까딱일 힘이 없어 팔다리를 아무렇게나 내팽겨쳤다. 새하얗다가 검어지기를 반복하는 시야는 멀쩡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이 상태 그대로 놔두기로 했다.
인정한다. 이번 폭발은 꽤 치명적이었다. 당장에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다. 이번에야말로 두 번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 같다⋯⋯.
'⋯⋯ 포기할까?'
달콤한 유혹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사람이라면, 생명이라면 응당 느끼는 욕구가 치밀어 올랐다. 편해지고 싶다. 이 정도면 많이 노력하지 않았느냐.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 했으니 그거면 됐지 않느냐.
그런 속삭임이 리베리우스의 눈꺼풀을 자꾸만 내리눌렀다.
"⋯⋯."
그래도⋯ 리베리우스는 어떻게든 정신을 붙잡고 있기를 택했다. 죽음의 문턱에 선 몸뚱아리는 앞을 보는 것조차 그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리베리우스는 어떻게든 두 눈을 뜨기로 했다. 그렇게 하고 싶었다.
반드시 동료들을 구해야 할 의무는 없다. 불의의 습격은 전쟁터에 들어온 이상 감수해야 할 리스크이며, 습격 대상이 리베리우스의 모습을 했다고 한들 이는 변하지 않는다. 동료들은 그들 나름대로 살아남을 것이며, 앞으로도 잘 살아갈 것이다.
심장 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들린다. 주위에 살아남은 생명체는 없었으며 눈이 내려앉는 소리가 시끄럽게 느껴진다. 리베리우스 또한 다른 시체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도저히 일어날 힘이 없었다.
세계를 구하는 사람이 리베리우스여야 할 이유는 없다. 리베리우스 이전의 '빛의 전사'가 그랬고 리베리우스 본인 또한 그랬듯, 앞선 영웅이 제 역할을 다 한다면 어디에선가 새로운 영웅이 나타날 것이다. 인간한테는 불의에 맞서 일어날 수 있는 힘이 있다. 리베리우스 말고도, 영웅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넘쳐난다.
팔뚝을 끌어당겨 앞으로 기어간다. 차라리 거북이가 더 빨리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다리가 돌부리에 자꾸만 걸려 덜컹거렸다. 얕게 쌓인 눈밭에 길다란 자국을 하나 그린다.
더 이상 싸울 수도 없고, 싸워야 할 목적도 없다. 어쩌면 이제는 리베리우스의 모험을 끝내야 할 때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베리우스는 앞으로 나아간다. 끔찍하리만치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나아가는 속도가 무섭도록 느리더라도, 여전히.
나아간다.
나아간다.
나아간다.
---
한 사람을 '그 자신'으로 결정하는 요소는 무엇일까. 영혼인가, 아니면 육체인가. 비늘이 뒤덮인 손을 죄암거리며 제노스가 생각했다.
만일 질문에 대한 답이 후자라면 자신은 지금 리베리우스를 손에 넣은 거나 마찬가지다. 말 그대로 리베리우스의 몸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 허나 만족스럽지는 않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열망하는 강함을 얻은 것과 마찬가지인데도, 리베리우스를 압도적으로 초월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제노스의 심장은 여전히 허전했다. 알라미고 왕궁에서 그가 느꼈던 것과 비슷한 고양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제노스는 그것이 지금 벗과 싸우지 않기 때문일 것이라고 단정지었다. 힘을 겨우 얻었어도 뛰어넘을 장애물이 눈앞에 없어서야 보람이 없다.
역시, 자신한테는 리베리우스가 필요했다.
그리고 머지 않아 자신한테로 돌아올 것이다. 예정대로 계획이 진행된다면, 얼마 안 있어 곧.
"뭐야, 돌아왔잖아!"
"무사해서 다행이군."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자 제노스가 시선을 들어올렸다. 가설된 에테라이트가 보이는 걸로 봐서 자신은 벌써 전초지에 다다른 것 같았다. 실망스럽다는 기분이 들었다. 리베리우스라면 여기까지 오기 전에 습격을 하리라 기대하고 있었건만. 뭐, 상관 없다. 이렇게 됐다면 예정대로 전초지를 몰살시키면 될 뿐이다.
걸어가던 속도에 변함을 주지 않고 제노스는 눈길을 따라간다. 영웅을 마중나오는 그의 동료들이 보인다. 머리 빨간 쪽은 기억에 없는 인물이지만 귀가 뾰족한 어린 여자는 이름이 아마 알리제였었지.
"어서 와! 갑자기 없어져서 다들 엄청 걱정했어."
"아무튼 무사해서 다행이야. 무슨 일 있었어?"
나의 벗이 아끼는 애완동물을 죽이면 과연 얼마나 격노에 차오를까. 제노스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그 웃음은 리베리우스가 귀애하는 동료들한테 평소 짓던 웃음과 크게 달랐다.
"⋯⋯ 넌 누구지?"
그라하─머리가 빨간 마법사 동료─가 알리제를 손으로 막아서며 물었다. 이상하다는 낌새를 느낀 모양새다. 그래도 상관 없다, 제노스는 암살같은 짓거리를 하지 않아도 이들을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에테르를 끌어올려 이계의 요마를 불러낸다. 불길한 기운을 뿜는 사신은 두 사람을 향해 낫을 휘두른다. 어렵지 않게 두 인간의 허리를 두동강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럴 터였다.
눈언덕 위에서 날아온 검 한 자루가 요마의 몸을 꿰뚫었다. 성긴 에테르로 이뤄진 요마는 금세 흩어졌다.
무산된 공격에 놀란 제노스는 검이 날아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제국군 군복을 입은 사람이 힘겹게 중심을 잡으며 서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무겁게 머리를 들어올린다. 아, 드디어 도착했구나! 제노스가 환한 웃음을 지었다.
"건들지 마, 제노스⋯!!"
피가래가 들끓는 목소리는 심히도 가냘퍼 당장에라도 끊어질 것 같다. 익숙하지 않지만 늘 그리는 목소리에 제노스의 다리가 절로 리베리우스 쪽으로 움직였다. 그래, 역시! 리베리우스라면 그 역경을 뚫고 찾아올줄 알았다! 기대를 배신하지 않아준 리베리우스한테 기특한 마음이 들어, 때가 되지 않았다지만 기꺼이 무기를 들어주고 싶어졌다. 당장이라도 하나뿐인 벗과 싸우고 싶었다!
성큼성큼 눈밭을 걸어 리베리우스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그 사이를 참지 못 하고 리베리우스는 자리에 쓰러졌다. 머리를 부여잡고 영 가누질 못 하는 것이 몸상태가 좋아보이지 않았다.
제노스를 방해하는 장애물은 또 있었다.
"네, 아쉽게도 두뇌 장악은 이걸로 끝. 각자의 몸으로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어느샌가 나타난 파다니엘이 두 번 박수를 치며 뭇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능청스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제노스는 심각한 갈증을 느꼈다. 눈 앞에 둔 사냥감을 포기하라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부탁이었다⋯.
하지만 기꺼이 인내해주기로 했다. 지금의 고통은 더 큰 쾌락을 위한 발판이 될 테니까.
파다니엘이 새벽의 혈맹한테 선전포고를 하는 동안 제노스는 쓰러진 리베리우스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투구 아래의 눈은 떠진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힘에 부치는 모양이었다. 제노스는 리베리우스의 턱을 들어올려 자신과 눈을 맞추기 편하도록 배려해주었다. 작별 인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제, 노스⋯⋯."
제노스가 입꼬리를 올렸다. 설원을 걸어오던 내내 채워지지 않던 심장이 이제야 겨우 뛰기 시작했다.
"너의 동료도, 세계도 모두 갈가리 찢어주지⋯⋯."
이 심장을 오롯이 채우기 위해서라면 제노스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나를 미워해라."
리베리우스와 싸우기 위해서라면 세계 하나쯤 멸망시킬 수 있다.
의식을 잃어 이제는 가치를 잃어버린 몸뚱아리를 바닥에 내팽개친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리베리우스의 몸에서 떠날 채비를 한다. 영혼을 잃어버린 리베리우스의 몸이 휘청이는 시야를 마지막으로, 제노스는 차디찬 설원을 뒤로 했다.
다시 만나는 날에는 그 때와 같은 행복을 손에 넣을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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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제노스의 계획은 무엇이었는가. 간단히 줄이자면 고대의 신을 깨우는 것이 목표였다. 잠들어 있는 어둠의 신을 불러일으켜 그를 흡수하고, 강대한 힘을 가진 채로 빛의 전사와 싸우는 것. 제노스는 그럴 작정이었다.
파다니엘한테 배신당하지만 않았다면 아마 그렇게 됐을 것이다. 종말과 죽음을 입에 달고 살던 파다니엘은 계획의 막바지에 돌발 행동을 진행했다. 제노스가 어둠의 신과 융화되기 전 봉인된 구덩이 속으로 몸을 던진 것이다.
고대의 신과 하나가 된 사람은 파다니엘이었다. 그리고 리베리우스는 파다니엘을 방금 막 해치운 참이다.
신이 잠들었던 장소, 하얀 달에는 옛 신의 잔해가 붉게 남아 비단실같은 궤적을 남기고 있었다. 인간이 한 번도 올 일 없었던 위성에서 자신의 고향을 내려다보며 리베리우스는 턱을 쓸었다.
'X됐군.'
어둠의 신이니 뭐니 부르기는 하지만 별의 이치를 움직이던 장치다. 없어지는 순간 별에 어떤 일이 생길지는 누가 보아도 자명하다. 리베리우스의 초월하는 눈은 행성 아이테리스에 벌어질 미래를 보았다. 에테르가 썩어가고 천맥이 고갈되는 모성을 보았다. 사람들이 비탄과 절망에 빠지는 광경을 보았다⋯⋯.
'내 탓인가? 아냐, 어차피 파다니엘이 그대로 조디아크와 융합된 상태였으면 자기가 스스로 저걸 일으켰을 거야.' 리베리우스가 눈알을 굴린다. '능동적으로 X되느냐 수동적으로 X되느냐의 차이일 뿐이었어. 아직은 실제로 종말 사태가 벌어지기 시작한 게 아니니까 괜찮을 거야⋯⋯. 해결 방법을 지금부터 찾으면 돼.'
⋯⋯ 그렇지만 해결 방법이 있기는 할까? 고대인들도 원인을 없애지 못 해 내놓았던 미봉책이 어둠의 신 조디아크였다. 에테르 함량이 현저히 적은 현대인들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는 장담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발로 뛰어보고 진창에서 굴러보긴 해야겠지. 이대로 모두 다 죽을 때까지 가만히 놔둘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러면 어디서부터 무얼 해야 하나⋯⋯.
리베리우스가 머리를 굴렸다. 그 꼴을 가만히 두고 보지 못 하는 사람이 있었다. 검붉은 에테르 덩어리가 봉인터 구덩이에서 거세게 솟아올랐다, 당장이라도 낫을 휘두를 것만 같은 기세로 리베리우스 쪽으로 걸어온다. 무기를 뻗으면 닿을 거리가 되었지만 리베리우스는 그것한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오로지 모성만을 올려다본다.
"⋯⋯ 가지 마라."
"⋯⋯."
검붉은 에테르를 몸에 두른 제노스가 낫을 들어올린다. 날을 리베리우스한테 겨눈다. 선뜩한 기운이 리베리우스의 뒷목을 쿡쿡 찌른다.
"가지 마."
"⋯⋯."
"⋯ 다시 찾겠다. 네 눈도, 귀도, 이빨도, 모든 투지를 나로 향할 수 있을만한 무언가를 가져오겠다. 기대에도 못 미친 고대의 신 따위가 아닌⋯⋯"
"⋯⋯."
"필요한 것은 더 큰 악⋯⋯ 더 큰 절망을⋯⋯."
"절망으로 나를 조종하려 들지 마."
그는 제노스를 보지 않았다.
"너만 즐겁자고 하는 싸움에 나는 어울려주지 않을 거다."
달의 모래밭에 판금장화의 발자국이 길게 남는다. 뒤를 돌아본 리베리우스는 제노스보다 더 먼 목적지를 향해 걸어간다. 시선마저 제노스한테 나누어주지 않았다. 온기를 나누어 주기에는 한 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제노스가 낫을 내린다.
"⋯⋯⋯⋯ 그런가."
"너라면 내 말을 듣지 않을 테지만."
리베리우스가 제노스를 스쳐 지나간다.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제노스가 곁눈질로나마 리베리우스의 흔적을 좇는 것과는 상반된 태도였다.
달의 바다에는 제노스만이 남았다. 이제는 텅 빈 구덩이를 내려다본다. 얼마 안 가 그의 형체가 흩어져 사라졌다. 언젠가 올 전투의 날을 위해 칼날을 벼려두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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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스가 짐승을 베어 넘긴다. 괴물이 죽은 다음에는 또 괴물을 벤다. 목을 날린다. 허리를 자른다. 대가리를 반으로 가른다. 언젠가 인간이었던 존재라 하더라도 상관하지 않는다. 인간의 형상이어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제노스한테 인간은 의미가 없었다. 사람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고 지껄이는 윤리와 도덕은 가치를 잃은지 오래다. 제노스의 아버지는 자신의 삼촌을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정말로 가족이 누구보다도 사랑해야 할 관계라면, 패륜을 저지른 황제를 국민들은 어째서 그렇게 추앙했단 말인가? 갈레말 제국은 인간을 무참히 학살한지 오래되었다. 정말로 인간이 가치 있는 존재라면, 제국 신민들은 중죄를 저지르고도 어떻게 머리를 뻣뻣이 들고 다닐 수 있는가?
도덕은 가변적이다. 영민한 제노스는 어린 나이에 그 사실을 깨달아버렸다. 눈 깜짝할 새 판도가 뒤바뀌는 놀음에 어울려줄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평생을 추구할만한 다른 가치가 있던 것도 아니다. 애초에, 쾌락 또한 순간이었다. 진미를 씹어도 향미는 스쳐 지나갈 뿐이요 향락을 일삼아도 몇 초가 지나면 허무함이 밀려올 따름이다. 학문을 배우는 재미를 알았다. 하지만 금세 질렸다. 자애를 베푸는 방법을 배웠다. 그러나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스쳐 지나가는 찰나 속에 반짝이다가 한순간에 꺼져버린다. 제노스는 그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다른 인간들은 어떤가? 진리를 깨닫지 못 한 채 눈 앞의 가치에 매달리기 급급해 의미 없는 발버둥을 반복한다. 핵심을 꿰뚫어보는 이는 아무도 없다. 제노스와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은 없다.
딱 한 사람, 리베리우스를 제외하고.
제노스는 리베리우스가 아직 리베리우스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던 시절을 기억한다. 동방 대륙 원정을 처음 나갔을 때, 한심한 야만족한테 선전포고문을 읊는 장교의 뒤에서 제노스는 허공을 올려다봤다. 이번 사냥은 그저 그런 실력의 제국군이 어중이떠중이들을 이럭저럭 상대할 뿐인 재미없는 사냥이 될 것이다. 전력차가 심하게 났기에 패배를 점칠 필요가 없었다. 시시한 임무에 제노스는 애초부터 흥미를 갖지 않았다.
지루한 시간이 언제 끝나나 궁금해하던 와중, 쓰레기들 사이에서 그나마 봐줄만한 원석 하나를 발견했다. 뿔 달린 야만족들은 제노스가 아닌 최전방의 장교한테 온 신경을 쏟았다. 시끄러운 틈바구니에서 제노스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건 새끼 야만족 한 명밖에 없었다. 제노스는 그 눈을 알았다. 사냥견이 토끼를 응시하는 표정이었다.
수십이 넘는 아우라 부족 중에서 제노스를 사냥하러 온 건 단 한 명이다. 한손에 장검을 들었던 에르킨은 이 무리를 통솔하는 자가 누구인지 꿰뚫어보는 시야가 있으며 제국군의 감시망을 돌파할 실력 또한 갖췄다. 장정 십수 명한테 제압당해 피를 흘리는 에르킨을 내려다보면서 제노스는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이 자라면 남들과 다를지도 모른다. 겨우 찾은 원석이 타인한테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답을 찾아내는 강함을 그 속에 지녔기를 바랐다. 자신과 같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서, 호적수가 될만한 사람이어서, 완벽히 몰두할 수 있을만한 행복을 선사해주길 희망했다.
옛날 이야기에 으레 나오곤 하는 그 설레임을⋯ 이름을 떨친 영웅이 느꼈을 법한 전투의 고양감을⋯⋯.
제노스는 그것을 위해 살아가기로 스스로 선택했다. 싸움은 제노스의 삶의 목적이었다.
"대체⋯⋯ 무슨 소리야⋯⋯?"
눈 위로 이어지던 제노스의 발자국이 멈추었다. 제노스는 푸른 눈동자를 굴려 발언자의 위치를 찾았다. 제국식 외투를 착용했고, 허리에는 제국군 병사한테 주어지는 보급형 검을 패용했다. 별 볼 일 없는 떨거지다.
제노스는 리베리우스가 저것과 함께 다니는 이유가 궁금했다. 제노스를 대하던 태도를 보아 제국 출신이라면 치를 떨며 싫어할 거라 예상했었는데. 리베리우스는 어금니를 가는 제국 군인과 한 편에 서 있었으며, 지금은 자신이 나설 자리가 아니라는 듯 몇 명 안 되는 무리의 뒤편에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보아하니 그가 말하는 선악 또한 제노스가 모르던 사이에 손바닥 뒤집듯 바뀌었음이 틀림 없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 하잘것없는 가치에 빠질 바에야 자신과 함께 싸우는 게 훨씬 행복했을 텐데. 제노스는 리베리우스를 이해하지 못 했다.
"갈레말 제국이 무너졌어⋯⋯ 우리의 조국이⋯⋯ 너희가 다스리던 나라가! 나처럼 군대에 있던 사람만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민간인까지 얼마나 많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제노스는 리베리우스가 제 품의 어린 여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의 심경이 많이 복잡해보였다. 백발의 여자가 어깨의 손을 다독여주는 것을 위안 삼아 본인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 같다. ⋯ 신기했다.
"너희가 원해서 벌인 짓이라고 들었다. 그게 사실이냐?! 사실이라면 대체 왜⋯!!"
"모두 사실이다. 이제 와서 보자면 아무 의미도 없었지만."
"제노스⋯⋯ 이 자식⋯⋯!!"
타인의 언행이 감정이나 생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건가?
권태로운 눈이 군인한테로 굴러갔다. 거기에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이유가 있으면 괜찮아지나?"
"뭐라고⋯⋯?"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면 눈앞에 벌어진 일들을 용납했을 거냔 얘기다. 만약 그렇다면 네놈들은 역시 어리석은 짐승⋯⋯ 사냥을 당하는 존재일 테지. 세상 만사는 언제나 유리한 누군가가 생기도록 흘러간다. 어떠한 이유라도 명분이라도, 선악이라 하는 것조차도. 갈레말이라는 나라의 중심부에서 수도 없이 볼 수 있지 않았나. 서로 죽고 죽이는 광경 속에서 올바름이 몇 번이고 뒤집히는 꼴을⋯⋯. 혹은 민중이 의기양양하게 내걸었던 정의가 계략으로 선동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제노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게 물든 하늘에선 유성우가 지상으로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네놈은 지금 내게 왜냐고 물었지. ⋯⋯ 한심하기 짝이 없군. 현실을 납득하기 위한 이유를 타인 따위에게 물어서 뭐가 된다는 거지? 그런 건 설령 땅 끝까지, 하늘 끝까지 가서 묻는다 한들 타인의 입장밖에 돌아오지 않는다. 자신의 생을 살면서 거기에 의미를, 답을 내놓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찰나동안 빛을 내어 순식간에 사라지는 유성우나 인간이나 다를 바가 없다. 전부 하나같이 시시하다.
리베리우스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네가 스스로 낸 답이 검을 뽑는 일이라면 나는 나의 명분대로 네 몸을 내 검의 양분으로 삼아주마."
"⋯⋯."
이름 모를 군인은 검 손잡이에 부들거리는 손을 올려놓았다. 당장이라도 발검할 듯한 자세였다. 제국민이 여러 실리와 이상을 머릿속에서 저울질했다.
"⋯⋯ 지금 당장이라도 슬픔과 울분을 모두 뱉어내면서 네놈을 때려죽이고 싶다. 하지만 그게 절망이 되고 괴물을 낳아 비극으로 이어진다면⋯⋯ 나는 너 때문에 피를 나눈 동료를 더는 잃고 싶지 않아. 꺼져⋯⋯! 그리고 두 번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나지 마⋯⋯!"
어금니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혹시나 해서 한 줌의 기대를 걸어보았지만 역시나 이렇다. 제노스의 머릿속에서 군인의 존재는 빠르게 잊혀졌고, 관심이 순식간에 리베리우스로 옮겨졌다. 지금껏 가만히 있던 리베리우스가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제노스. 어떤 면에선 네 말도 옳은 말이야. 방금 말을 한 사람이 네놈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쯤 박수를 치며 칭찬을 쏟아내고 있었을걸."
"⋯⋯ 호오."
"하지만 너따위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게 가장 유감스럽네. 너의 부도덕을 정당화하려는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참 안타까워. 네 주제를 알아."
"벗이여, 이러니 내가 너한테 늘 실망한다는 거다. 네게는 분명 나와 똑같은 걸 선택할 기회가 몇 번이고 있었다⋯⋯."
"나는 내 삶이 다 할 때까지 인간으로 남고 싶거든. 너와는 달리."
흔히 보이던 웃음 하나 내어주지 않는 리베리우스의 품에 계속 안겨있던 여자 아이가 리베리우스의 말을 받았다. 제 분에 못 이겨 무심코 서두를 던졌다는 느낌이 났다.
"제노스, 당신이 살아가는 방식은 확실히 강해. 일리는 있다고 봐. 하지만 그걸로 타인을 상처입히면 당신은 앞으로도 계속 고독할 거야. 당신이랑 전투든 뭐든 하고싶어할 리가 없어."
"⋯⋯ 알리제."
"남한테 바라는 게 있다면 본인이 즐길 생각만 하지 말고 함께 즐기려고 해야지. 그런 당연한 것도 모르겠다면⋯ 영원히 거절당하시든가."
제노스를 노려보는 눈매는 비웃음을 내보이는 리베리우스와 닮았고, 한쪽 입꼬리만 올라간 표정 또한 전투에 몰입한 리베리우스를 떠올리게 했다. 그런 여자아이를 리베리우스가 다독여주는 모습을 제노스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노스의 기억과 달리 리베리우스의 표정이 퍽 부드러웠다.
"알리제. 괜찮아요. 하지 말아요. 당신이 굳이 힘들여서 한 소리 할 필요 없어요."
"하지만 저게 짜증나게 하잖아⋯!"
"알아요. 그래도 저게 우리가 하는 말을 들을 리가 없잖아요? 우리 말을 조금이라도 들으려 했다면 애초에 사태가 이렇게 되지도 않았겠죠. 알리제 입만 아플 거예요."
리베리우스는 제노스를 보지 않았다.
"저한텐 알리제가 있으니 괜찮아요. 저를 위해 화내려 해줘서 고마워요."
제노스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망막 위에 지금 장면이 오래도록 남는다. 천천히 몸을 돌려, 제노스는 옛 갈레말 제국 터로부터 떠나가기 시작했다.
눈밭 위에 남는 발자국은 한 줄밖에 없다. 바다를 건너면서도, 숲을 지나면서도, 사막을 가로지르면서도 제노스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혼자 걷는 것을 어색하게 여겼던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제노스는 혼자 있는 게 당연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신기하게도,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쾌감이나 희열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있어야 할 것만 같다.
발길이 닿고 닿아 지금 도착한 곳은 알라미고의 공중 정원이다. 일전에 두 사람이 맞서 싸웠던 장소이며, 제노스의 삶이 한 번 막을 내렸던 그 곳이다. 이제는 볼일이 없는 알라미고 왕궁에 굳이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제노스는 알지 못 했다. 그저 예전처럼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공간에서 선회한다.
날씨는 건조하고 후덥지근하건만 여전히 설원 위의 풍경을 잊을 수가 없다.
"남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본인이 즐길 생각만 하지 말라고 했던가⋯⋯."
제노스가 중얼거렸다.
"여기서 결판을 지었을 때, 나는 네게 뭘 원했지⋯⋯?"
너는 내게 뭘 원했지?
제노스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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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백10 | 효월 | 잡담방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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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킨은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다. 아마도 이렇겠거니- 하고 어렴풋한 추측만 해볼 수 있었다.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행동을 주로 한다고 하니 이 행동을 하는 사람은 상대를 사랑하고 있겠구나. 이렇게 피상적인 이해만 가능했다.
기실 에르킨한테는 대부분의 이차적 감정이 지나치게 어렵다. 애정이란 무엇이며 수치심은 어떨 때 느껴야 적절하단 말인가. 심장이 기이할 정도로 두근거릴 때마다 주변 물건을 부수어 버릇하니 어떨 때는 그래선 안 된다고 하고 어떨 때는 그럴만 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정말로 이상하다. 내가 느끼는 신체적 반응은 동일한데 내가 파악하지 못 하는 무언가에 따라 이름이 전부 다르게 붙여진다.
파악이 어렵다. 구별이 어렵다. 그래도 에르킨은 각고의 노력을 들여 그것들을 학습했다. 듣자하니 자신이 안정을 느끼는 사람들과 함께 살려면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모양이었고, 인간들은 이 모든 걸 어렵지 않게 구분할 수 있는 듯 했다. 에르킨은 아버지가 자신을 안아줬을 때 느꼈던 온기가 좋았다. 어머니가 머리를 쓰다듬어줄 때 느꼈던 감촉이 좋았다. 그것을 영원히 느끼고 싶었기에 에르킨은 인간이 되고자 했다. 그 선택을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래도 가끔씩 답답함을 느꼈다. 에르킨은 학문을 배우며 재미를 느꼈다. 하지만 금세 질렸다. 타인한테 자애를 베푸는 즐거움을 배웠다. 그러나 마음이 오래도록 동하지는 않았다. 무언가가 부족했다. 심각히도 많은 것이 비어 있었고 에르킨은 그 정체를 깨닫지 못 했다.
해소되지 못한 욕망은 어린 에르킨의 등 뒤에 달라붙어 한참동안 속삭였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면 달라질지도 몰라. 어딘가에는 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몰라. 정체 모를 답답함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이상향이 있으리라 믿었다. 희망을 품고 에르킨은 가족의 품을 떠났다. 머나먼 동방 대륙의 고향으로 돌아가면 자기 자신에 대해 더 자세히 알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소망이 모든 것의 시발점이었다.
자신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는가를 생각해보면, 잘 모르겠다. 여전히 많은 것을 모른 채 지낸다.
절망의 현상 그 자체를 마주할 때 리베리우스는 홀로 있었다. 지금껏 등을 밀어주고 길을 밝혀주었던 동료들은 리베리우스 본인에 의해 현장에서 이탈되었다. 많은 사건을 겪은 뒤 다다른 종착점에는 절망만이 눈에 보였고 존재라곤 리베리우스뿐이 없다.
여기까지 당도했음에도 확신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자신은 무얼 위해 싸워왔는가. 지금까지 겪었던 모든 시간은 자신한테 어떤 의미가 되는가. 절망은 무엇인가, 행복은 무엇인가, 슬픔은 무엇인가, 기쁨은 무엇인가.
생명이란 무엇일까. 마음이라는 건 뭘까.
"모르겠어."
먼 곳을 향해 중얼거렸다.
"나는 전혀 모르겠단 말야."
사람들은 리베리우스를 보며 저마다의 깨달음을 얻곤 했다. 보아라, 수없이 많은 절망 속에 짓눌려 있던 희망 한 조각 또한 리베리우스의 마음을 통해 삶의 의미에 대해 깨닫지 않았는가. 파랑새가 되어 마지막 남은 희망을 온 세계에 퍼뜨리면서 그것이 리베리우스 덕에 일어난 기적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리베리우스는 실로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었다. 네가 말하는 게 무언지 잘 알겠다며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말했다. 전에도, 이전에도, 한참 전부터 그랬듯이, 모든 것을 받아들였노라 쉬이도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게 된 다음에야 털어놓아 본다. 나는 너희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나는 결코 너희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돌아갈 건가? 네가 영웅이 되는 세계로."
"⋯⋯."
⋯⋯ 정정하겠다. 세상의 끝에 남은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남아있었구나. 몰랐네, 제노스."
리베리우스는 제노스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알지 못 했다. 그냥 어느새⋯⋯ 홀로 남은 채 종언을 노래하는 자와 한 판 붙으려고 했더니 갑자기 하늘을 깨부수고 쳐들어와서는 이번 한 번만 도와주겠다고 건방진 선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
솔직히 제노스의 도움 따위 필요 없었다. 그래서 리베리우스는 제노스가 없는 셈 쳤다. 평소처럼 귀찮은 짐 하나 떠안은 채 싸운다고 생각하기로 했었다.
뭐어, 발판 역할을 해준 건 고맙긴 하다. 한 꼬집만큼.
"그래서⋯⋯ 보나마나 싸우자고 할 생각이지? 포기해줄래? 너도 알겠지만 내가 지금 많이 지친 상태거든⋯⋯. 너따위한테 할애할 힘이 없어. 여력이 있더라도 싸울 생각 없고."
"⋯⋯ 벗이여."
"안 싸울 거니까 알아서 돌아가. 여기서 평생 썩어주면 더 좋고."
"에르킨."
"안 싸운다고."
"내 말을 들어라."
"싫어."
제노스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리베리우스를 응시한다.
"한 번만이라도 좋다. 영웅이 아닌 너로서⋯⋯ 리베리우스가 아닌, 에르킨으로서 들어다오."
"⋯⋯."
에르킨은 긍정의 뜻을 침묵으로써 내비춘다. 무기를 들지 않은 상태로, 제노스는 에르킨한테 하고 싶었던 말을 하나씩 꺼내본다.
"나는 아마도⋯⋯ 이대로 영생을 산다 해도 너를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거다. 이상이니 명분이니, 타인이 규정한 영문도 모를 것들을 위해 살겠다는 건 공감할 수 없어."
"⋯⋯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평생동안 고민해봐도 너의 삶의 방식은 도저히 받아들일 만한 게 못 될 거다."
"하지만 살면서 한 번쯤은 양보라는 걸 해봐도 나쁘지 않겠지. ⋯⋯ 그럴 생각으로 나는 이 곳에 왔다. 벗이여."
에르킨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당황하면 안 된다, 저것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배신당한다. 그렇게 되내이며 마음을 다잡는다.
"그렇지만 내가 너한테 줄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알다시피 나는 친족도, 직위도, 부와 명예도 모두 버렸으니까. 네 앞에 있는 건 단지 제노스라는 인간 한 명일 뿐이다⋯⋯."
"⋯⋯."
"⋯ 허면 나는 너한테 무엇을 줄 수 있나. ⋯⋯ 알라미고에서 벌인 결전에서 나는 무엇에 환희했는지를 생각해보았다. 네가 비할 데 없는 강적이었다는 사실. 마지막 숨까지도 쥐어짜는 극한의 싸움을 할 수 있었던 것. 다시 말해⋯⋯ 자신의 생명을 불태우는 일이다."
헛웃음이 나온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자기한테 지나칠 정도로 솔직했다.
"그것이 나의 기쁨이자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희열일 테지."
제일 화가 나는 것은 제노스의 말을 에르킨이 공감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한 발이라도 잘못 딛으면 목숨을 잃어버릴 공간에서 에르킨이 느끼는 감정은 기쁨이었다. 도저히 부정할 수 없다. 한계까지 생명을 쥐어짜내야 할 전투를 겪는다면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할 것이다. 에르킨은 그걸 알았다.
"에르킨. 네 눈 앞의 사내를 보아라. 여기에 제국의 황태자는 없다. 에오르제아의 침략자도 아니며, 아이테리스에 가해지던 위협은 없어진지 오래다.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
"이 곳에 타인이란 없다. 오로지 너와 나, 둘 뿐이다."
에르킨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하여 나는 요구한다, 나는 지금 여기서 너와 다시 한번 싸우고 싶다. 응할 마음이 없다면 그대로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도 좋다. 그것 또한 너의 선택이겠지⋯⋯."
멍하니 제노스를 바라보던 에르킨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간다. 누구한테도 보여준 적 없던 날것 그대로의 감정이 드러난다.
"⋯⋯ 정말로⋯ 진심으로⋯⋯."
제노스 말고는 이런 표정은 도저히 남한테 보여줄 수 없겠지. 그 사실이 퍽 유쾌하다.
"너따위 그냥 죽여버리고 싶다."
허, 하는 웃음소리가 난다. 둘 중 누가 낸 소리인지 구별이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승부를 내자. 나와 너의 생명으로⋯⋯ 수없이 많은 하늘의 별들을 모두 불태우자꾸나!"
신이 나 어찌할 줄 모르는 저 상판대기를 뭉개버리고 싶다. 욕망의 실현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에르킨이 도끼를 힘껏 던졌고 제노스는 낫으로 도끼를 쳐냈다. 부메랑처럼 날아온 도끼를 낚아채 그대로 원심력에 올라타 도끼를 휘두른다. 제노스의 목을 날려버리려 했다. 당연히, 제노스는 순순히 목을 내어주지 않았다. 낫과 도끼가 마찰하며 불꽃을 튀긴다.
기합과 함께 낫을 쳐낸다. 몇 걸음을 물러난 제노스가 팔을 들어올리는 게 보였다. 에르킨의 눈동자가 낫의 각도를 빠르게 훑는다, 곧 전방으로 연속 공격이 크게 올 것이다. 스탭을 옆으로 빼내 미리 읽은 공격을 피한다.
"약해빠졌어, 제노스!"
목을 긁는 목소리로 외쳤다.
"네 패턴 존나 쉬워! 자면서도 피하겠다!"
"후, 나도 즐겁구나! 벗이여!"
비어있는 옆구리를 노려 휘둘러진 도끼를 자리에서 뛰어오르는 것으로 피해버린다. 도끼날 위에 발을 딛고, 에르킨의 등 뒤에서 낫을 찍어내린다. 견갑골에 깊은 상처가 났음에도 에르킨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는다. 제노스가 올라탄 도끼를 그대로 바닥에 메친다. 이 곳이 평범한 지형이었다면 분명 지면에 커다란 구덩이가 생겼을 위력이었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지면에 메다꽂힌 제노스의 시야가 크게 휘청인다. 그래도 아직, 싸울 수 있다.
"한참 부족하다⋯⋯!"
몇 합이 더 지나간다. 철가루가 휘날리고 피가 튀었으며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그래도 아무도 멈추지 않았다.
"아직 더 할 수 있어⋯⋯!"
에르킨이 살아있다. 제노스가 살아있다. 그것만으로 두 사람이 싸워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거리를 벌리려 하던 제노스의 손을 노리고 도끼를 던졌다. 도끼날은 손목을 깊게 베며 지나가 낫을 놓치게끔 했다. 당황할 틈이 없다, 제노스는 손에 잡히는 아무 무기나 들어 에르킨한테 휘둘렀다. 에르킨 또한 가까이에 있는 아무 거나 주워들었다. 낫 손잡이에 아직 남은 열기가 상당히 불쾌하다고 에르킨은 생각했다.
제노스를 밀쳐내고 에르킨이 낫을 크게 휘두른다. 도끼술사의 방어가 쉽게 약해지는 지점을 에르킨은 잘 알았다. 헌데 신기하게도 제노스는 도끼를 든 초보가 공격을 쉽게 허용하는 허벅지를 방어하는 데에 성공했다. 심지어는 중간에 방향을 틀어 에르킨의 팔뚝을 도끼로 찍으려까지 하는 게 아닌가. 그걸 본 에르킨의 짜증이 머리 끝까지 치솟았다. 저 도끼를 능숙하게 다루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었는데!
"죽어!!"
제노스의 복부에 낫이 깊게 박혔다. 토혈을 하며 제노스가 뒷걸음질을 치고, 에르킨은 바닥에 떨어진 도끼를 주워든다. 추가타를 넣기 위해 도끼를 들어올리자 제노스가 웃음을 터뜨린다.
"흐하하하⋯! 그래, 이런 게 바로 싸움이지!"
자기 복부에 박힌 낫을 거세게 뽑아낸다. 그러자 검붉은 에테르가 폭풍처럼 제노스를 세차게 감쌌다.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사나운 흐름에 에르킨은 팔뚝으로 눈가를 보호하며 어떻게든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애썼다.
찰나, 제노스가 검은 장막을 뚫고 달려드는 걸 보았다.
후두둑. 살덩이와 뼛조각이 우수수 떨어진다. 에르킨의 세상 반쪽이 순식간에 소리를 잃었다. 노이즈가 뇌 속을 어지럽히고 유일하게 뚜렷한 것이 허벅지를 적시는 핏물의 뜨끈함밖에 없었다. 아프다. 떨어져나간 뿔의 단면이 불타는 것 같다.
"이런, 고작 이 정도로 뻗어버렸나⋯⋯?"
당장이라도 달려들 준비를 하며 제노스가 에르킨을 도발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눈을 굴려 살펴보니 제노스는 자신의 몸에 요마를 빙의시켜둔 상태였다. 그래서 이렇게 순식간에 스피드며 위력이 급작스레 증가한 거였다.
뻗어버렸냐고?
싸우지 못 하겠냐고?
"개소리 하고 있네⋯ 야, 나 안 죽었다."
전투의 짜릿함이 에르킨을 계속 서있게 했다. 서슬퍼렇게 빛나는 에르킨의 두 눈이 아직 투지를 불태운다.
"두 팔 멀쩡히 잘 달려있으니까 덤벼."
"후후, 그렇지⋯⋯! 이대로 끝나기엔 이르잖아, 벗이여!"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내달렸다. 날과 날, 에테르와 에테르가 맞부딪쳐 경쾌한 마찰음을 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 한 경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아아, 정말로.
지금 이 시간이 영원하기를 마음 깊이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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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씁... 이거 진짜 한참 뒤에 쓰려고 했는데... | 효월 | 잡담방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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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스의 확인사살을 해야 했다. 영웅의 이름을 등에 업은 자의 의무 중 하나였다.
그러나 리베리우스는 ─ 에르킨은 움직일 수 없었다. 혹사당한 몸은 비명을 질러댔고 에테르는 바닥이 나는 걸 넘어서 신체를 구성하는 에테르조차 쥐어짜내진지 오래였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겨우 들어올린 고개는 부러진 뿔의 방향으로 자꾸만 기울어져 바닥에 처박힌다.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워지기 시작한다.
어쩌면, 이제는 포기해야 할 때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제는 멈춰야 할 때일 수도 있었다.
제노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 이 세계에 태어나, 이름을 얻고, 살아오며......"
시끄러워. 하나도 안 들려. 리베리우스는 그를 비웃어주고 싶었지만 얼굴 근육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 걸어오며......"
소리를 들어야 할 뿔을 부러뜨린 게 네놈이지 않느냐. 반병신을 만들어 놓은 게 자신이면서 대화를 청하려 하느냐.
대꾸를 하기보단 억지로나마 몸을 끌고가는 것을 택했다. 저 놈이랑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있다는 희망은 버린지 오래였다. 왼팔은 움직여지지 않으니 오른팔로만 바닥을 쓴다. 굼벵이만도 못 한 속도로, 제노스를 향해 기어간다.
"무엇을 생각했지......."
전투 도끼가 이렇게까지 무거웠었나? 안간힘을 다 써야 겨우 조금 끌고 올 수 있을 따름이다. 손가락 끝에 제노스의 몸이 닿는 것 같자 리베리우스는 도끼자루를 지지대 삼아 상체를 일으켰다. 숨을 몰아쉬는 입에서는 침이, 뒷목과 관자놀이에서는 폭포수같은 땀이 흘렀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부연 시야 너머로 제노스가 보인다. 허공을 좇던 것 같던 제노스의 눈동자는 얼마 안 가 리베리우스와 시선을 맞춘다. 그 눈동자 또한 생기가 없다. 모든 것을 불사른 뒤의 적막이 그 곳에 있었다.
리베리우스는 그것이......
"...... 충분히 즐거웠나......?"
......
리베리우스가 무너졌다. 더이상 버틸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풀썩 소리와 함께 엎어지자 풀린 눈으로 제노스의 턱을 바로 코앞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그의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했다.
"...... 나는...... ......"
제노스의 숨이 꺼져간다. 마지막으로 내뱉는 숨을 리베리우스는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 느껴지는 감정이 옳은지 모르겠다.
"......"
하지만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 곳, 세상의 끝에는 오로지 너와 나 둘 뿐이니까.
"계속, 널 죽이고 싶다고 생각했어."
리베리우스가 자조했다. 말을 듣지 못 할 상대에게 말을 거는 건 서로 똑같구나.
"타협의 의지가 없는, 세계의 위험 요소는 제거하는 게 맞으니까... 그게 옳으니까. ... 그 이전에... 네가 미웠으니까, 너를 증오했으니까......"
눈이 감긴다.
"............ 그런데 지금은 널 살리고 싶다는 마음도 들어..."
눈을 감는다.
"끝까지 내 말을 전혀 안 들은 개같은 자식........."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은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만족스러운 전투를 했다. 더없이 시원하고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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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나──'
'어서── 를──'
'── 줘── 제발──'
'좀── 줘요──'
'제발──'
사람이 죽을 때 가장 마지막까지 남는 감각은 청각이라는 것이 생각났다. 그러고선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가 생각을 할 수 있다니? 그야 물론 생을 마쳐 별의 바다로 돌아간 영혼이라 할지라도 사고 활동을 계속 이어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자신은 모성을 벗어나 사망했으니 별의 바다로 가지 못 하리라 예상했건만. 행성 하이델린에서 태어난 생명은 그 어디에서 죽더라도 하이델린으로 다시 돌아가는 건가? 이 예측이 사실이라면 세기의 발견이 될 거다.
그렇지 않다면......
'그게 마지막이라니 절대 용서 못 해......! 일어나란 말이야......!'
귀애하는 어린 동료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아이의 분노는 두려울 정도로 매섭다, 어서 화를 풀어줘야 하는데......
머리를 쓰다듬어줄 요량으로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손가락에 뜨거운 피가 돌기 시작했다. 눈을 맞춰 웃어줄 요량으로 눈을 떴다. 그러자 눈이 아플 정도로 밝은 빛이 쏟아져 내렸다. 무어라 말을 하고자 하니 숨이 터져 나왔고, 그제야 나를 둘러싼 동료와 소음과 에테르가 흐르는 감각을 전부 지각할 수 있었다.
나는, 그래, 동료들한테 돌아왔다.
"자네, 정신이 드나......?!"
둥실둥실, 영혼이 떠다니는 듯한 기분이다. 멍한 정신으로 시선을 내리니 늘 그렇듯 자랑스러운 쌍둥이의 모습이 양쪽으로 보인다. 연상인 알피노는 내 몸에 치유마법을 걸고 있고, 동생인 알리제는... 울고 있는 건가? 정수리밖에 보이지 않아서 확실하진 않다. 전투 뒤에 수분 손실이 많이 발생하면 회복이 더뎌질 텐데 걱정이다.
눈동자를 바삐 굴리느라 알피노의 질문에 뒤늦게 반응해 버렸다. 대답다운 대답은 하지 못 하고 입꼬리를 올리는 게 전부였지만 말이다. 다행히 알피노한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던 모양이다.
"아아......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저 아이가 기쁘다면 나도 기쁘다. 나는 습관적으로 그한테 웃어주었다.
그러면서도 나의 머리는 바쁘게 돌아갔다. 그러니까, 적어도 지금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최대한으로. 내가 누워있는 이 공간은 눈에 익은 곳으로 우주선 라그나로크의 내부일 것이다. 일곱의 동료 모두가 선내에 있으니... 내가 전투 중 작동시켰던 비상 탈출 장치는 정상적으로 작동했던 모양이고. 진심으로 한시름 덜었다.
그리고 동료들을 전송시켰던 그 공간에 내가 있다는 건. 그러니까, 다시 말 해.
"............ 저 지금 살아 있는 건가요...?"
답을 바라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성실하게도 내 질문에 답을 해주는 동료가 있었다.
"그래, 제대로 살아있어......!"
붉은 눈이 특징적이던 그라하는 그 눈가에 눈물방울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었다. 내가 살아있다는 말은 대답이기도 했지만 스스로한테 되새기는 말같기도 했다. 울음이 벅차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모습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살아있나요......"
영락없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 살고싶었나 봐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습관적으로, 좋은 인상을 위해, 사회적으로 기능하기 위한 웃음이 아니었다. 이들과 함께 할 때면 충족된 마음이 저절로 자아내는 미소가 있었고, 지금 터져나오는 환희는 그것들의 정수만을 모으고 또 압축시켜 가장 순수한 부분만을 남겨놓은 것만 같다.
소리를 낼 때마다 폐가 터질 듯이 아팠지만 멈추지 못 했다. 내 웃음 소리는 피 섞인 기침과 함께였고 온몸을 수놓은 고통이 그 뒤를 따랐다. 머리맡에서 치유사 동료가 내 어깨를 지그시 누른다.
"아직 상처가 깊습니다. 움직이시면 아물지 못 한 부상이 벌어집니다......"
"우리의 간담을 더 서늘하게 할 생각이 아니라면 가만히 있어줘요. 심장이 떨어질 듯한 경험, 이젠 더 하고싶지 않네요."
마도사 동료의 책망하는 듯한 어투에서 애정을 느낄 수 있는데 어떻게 웃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그들이 불가능한 부탁을 한다고 생각했다. 실없는 미소와 함께 입을 연다.
"...... 죽어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어요."
몇몇이 몸을 굳히는 게 보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너희라면 알 거예요, 내가 얼마나 싸움을 좋아하는지... 얼마나... 싸움에 목말랐는지......"
"너는 지금 상황에서도 그런 말을...!"
"싸움터 속에서 죽을 운명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럴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았어요...... 아아... 이번 전투는 정말로 완벽했어요...... 이대로 죽어버려도... 후회는 없을 거라고...... 그럴 것 같았는데......"
"리베리우스! 당신 그렇게 말 할 거야?!"
"... 그런데 나는 살아남았네요."
제노스는 이 곳에 오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 숨을 내뱉던 모습을 기억한다.
"너희들과 살아가고 싶었나봐요......"
그리고 그것이 자신과 제노스의 유일한 차이일 것이다. 같이 걸을 수 있으며 함께 미래를 그리고 싶은 사람이 곁에 있는지가, 죽어버린 제노스가 채우지 못 했던 결핍이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내가... 생각보다 더... 훨씬 더... 너희를 좋아했던 것 같아......"
옆에 있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자신을 살렸을 것이다. 이 세상은 사람의 마음에 대답해주는 상냥한 세상이니까.
이야말로 세기의 대발견이다. 천지가 개벽한다 해도 이보다 놀라지는 못 하며 이만큼 행복하지도 못 하리라. 이제라도 알았으니 괜찮다. 이것만 있어도 나는 괜찮다......
"... 이봐, 정신 차려! 잠들면 안 돼!"
"당신 진짜... 그 말만 남기고 떠나기만 해봐...!"
긴장이 풀렸기 때문일까, 고양감과 함께 다시 한 번 의식이 꺼져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내가 다시 여기로 돌아오리란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다음에 일어나면 동료들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줘야지.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나는 수마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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